태양과 달빛으로 남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 대개는 놀라운 집중력이 있었다는 거다. 어떤 이는 영한사전의 페이지를 씹어 먹어 가면서까지 사전을 통째로 외웠으며, 어떤 이는 법전을 달달달 외워서 유명한 판검사가 되어 결국에는 총리가 되었으며, 또 어떤 이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의학서를 막고 품는 스타일로 외워서 의사면허를 따고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저명한 양의가 되었다.
명리학과 한의학의 연결고리인 ‘오행사상’을 꿰뚫어 본 한의사이자 명리학자인 두암 한동석 선생은 ‘황제내경’의 ‘운기편’을 일만번 암송하여 활연관통했다고 전해지며, 황진이의 연인이었던 임백호는 속리산 정상의 암자에 파묻혀 ‘중용’을 오천번 읽고 한 경지를 터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하여, 누구는 역사속의 인물이 되었으며 누구는 역사로 평가받지 못하고 신화로 남는 존재가 되었던 거다.
그들 대개는 점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였거나 경제적 환경이 되지 못하였거나 지도받을 수 있는 선생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이었지만,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 그들 대개는 성공을 하였다. 공부의 방법중에 무조건 외운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을 때에는 막고 품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야구에서도 변화구나 체인지업을 던질 상황이 안되면 강속 직구를 뿌릴 수밖에 없는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내용을 외워 일만번을 암송한다면 도(道)도 통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옛말에도 ‘사지사지 귀신통지(思之思之 鬼神通之/ 생각하고 생각한다면 귀신과도 통한다)’라 하지 않았겠나. 불교의 도 닦는 방법에도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 조차도 낮의 생각처럼 한결같이 생각함)’라 하여 선사들의 참선 수행방법에 있음이다.
1992년 71세의 나이로 별세한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이신 이병주선생께서 남긴 말씀 중에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歷史)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된다.”는 말씀은 명언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선생을 존경하기도 하지만, 그의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그 중 누구는 역사에 남고 그 중 누구는 신화가 된다. 기업과 정치판/ 연예계에도 수많은 별들이 명멸했지만 그 중 스타로 인정받은 자 다시 말해 역사가 된 자는 아주 드물다.
명멸하였으되, 스타가 되지 못한 더 많은 군상들은 역사도 되지 못하며 신화로도 남지 못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슬퍼할 일만도 아니다. 비록 역사도 신화도 되지 못하였지만, 태양과 달빛 속에서 때로는 준마위에 올라탄 채 힘차게 내달려 질주를 맛보았고 때로는 웃으며 사랑하고 태양과 달빛을 넘나들면서 즐기며 희롱하고 한평생을 유쾌하게 놀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역사와 신화로부터 외면당한 필부 또한 남아있는 시간동안 천수경(千手經)이나 일만번 독경하여 득도(得道) 연후에 어느 날 홀연히 천상계(天上界)에 올라 뒷짐지고 한가로이 휘적휘적 둘러봄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