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에 와닿는 바람이 아직은 싸늘하지만, 남녁 매화의 소식은 춥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립니다. 하여, 선인들은 매화를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중 하나로 칭하였으며, 절개와 충절/ 역경을 이기는 강인한 의지의 표상으로 보았습니다. 고결함/ 기품/ 인내의 꽃말처럼, 꽃은 화사하되 요란하지 않으며 그 향기는 은은하되 매혹적입니다.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며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도 '봄날' 매화를 보러 떠났습니다. 봄의 문이 열렸다고는 하지만, 남녁 광양과 하동 섬진강가 등지에 양계장의 닭처럼 무더기로 피어있는 일본산 매실나무의 꽃들은 활짝 피었으나 우리의 해묵어 오래된 전통의 고매화들은 아직 제대로 만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엄사의 흑매도 아직은 꽃이 부족합니다.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 오동은 천 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 동안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월도천휴여본질(月到千虧餘本質)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바탕이 남아 있고
유경백별우신지(柳經百別又新枝)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
이 겨울 내내 저 매화를 기다려 왔습니다.
겨울이 유난히 추웠기에 그대와 나란히 서서 꽃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얼어서 터진 남루의 손등 감추지 않고/ 그대의 손을 잡고 꽃 앞에 서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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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홍매화꽃 사태 속에서 그대는 나의 꽃이었습니다.
우리는 억겁 인연의 가지에서 만난 따뜻한 햇살과 꽃이었습니다.
나는 그대에게로 무너지는 햇살이었고, 그대는 나에게로만 피는 꽃이었습니다.
----- 시인 정일근의 '사람의 사랑도 꽃이 될 수 있으니' 중에서...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에는 600년을 넘도록 오래 된 '선암매(仙巖梅)'가 있으며, 선암사 원통전 담장 뒤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매화입니다. 꽃이 붉고 향이 짙으며 대웅전을 지나 원통보전을 가는 길에 돌담과 어우러져 피어 만개한 홍매화/ 백매화는 일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것은 홍매인데.. 이번 출행에 선암사의 홍매화는 아직 제대로 피어있지 못하여 아쉬움이 많습니다.
고결한 정신의 맑은 기품을 연상케 하는 매화의 이미지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상징하는 청렴의 꽃이라 해야 매화 예찬론이 제대로 될 것 같지 않겠는지요. 오래 전 옛 선비들은 엄동설한의 긴 겨울과 추위에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그림을 그려두고 견뎌냈답니다. 동짓날 창호지에 하얀 매화꽃 81송이(9X9)를 그림 그려 벽이나 창문에 붙여놓고 하루에 한 송이씩 날마다 빨갛게 색칠을 해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짓날로부터 81일이 되어 매화꽃 그림이 모두 붉게 색칠하여진 날에 남으로 난 창문을 열면 진짜 매화가 뜰 앞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풍류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봄의 문이 열렸으니 비가 내리지않는 한 탐매를 위한 나의 출행은 계속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