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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大衆)의 분노(憤怒)

Led Zepplin 2016. 5. 15. 01:09



  “어린 아이가 마루에서 우유가 든 병을 옆에 둔 채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 우유를 먹어 버렸습니다. 아이는 잠에서 깨어나서 우유병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울고 말았습니다. 그 울음을 듣고 난처해진 생쥐는, 양에게로 달려가 젖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양은 자신의 젖이 말라서 우유를 줄 수 없었습니다. 신선한 풀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죠.

생쥐는 다시 들판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들판에는 물이 말라 신선한 풀이 없었습니다.

다시 생쥐는 우물에게로 뛰어 갔습니다. 아름답고 튼튼했던 우물은 이젠 허물어져 바닥에도 물이 없었습니다. 다시 생쥐는 석수장이에게 우물을 고쳐달라고 졸랐습니다. 하지만, 그 석수장이는 적당히 알맞은 돌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생각다 못해, 생쥐는 산(山)으로 달려갔습니다. 산은 생쥐의 말을 외면하였습니다. 나무가 모두 사라진 산은 이미 민둥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쥐는 산에게 부탁 하였습니다. 지금 산이 돌을 내어주면, 나중에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 산에 벚나무도 심고 소나무도 심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산은 결국, 돌을 생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아이는 우유를 양껏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아이는 산에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마침내, 산이나 들판에서 흙이 씻겨 내려가는 일이 없게 되자 땅은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이 동화를 쓴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자 맑스주의 혁명가라는 이유로 1926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10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람시’는 가족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서 아직 만나보지 못한 나이 어린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고향 마을 사르데냐에 대해 들려주고자 이런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를 적어 보냈다. 이 동화는 혁명의 꿈은 사라지고 가족과 동지들도 모두 흩어지고 몸은 병들어가던 극도의 공포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쓴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다른 존재의 고통과 슬픔이 덜어지지 않고는 나의 운명(運命)도 결코 나아질 수 없음을 뛰어난 시적 상상력(詩的 想像力)을 통하여 아름답도록 설명해 주고 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는 레슬링을 좋아하고 좋은 체격과 체력을 지녔으나 지적인 면이나 치정(治政)에 대해서는 부왕 ‘카를로스 3세’의 반 수준에도 부족했으며, 사촌여동생인 ‘마리아 루이스’와 결혼이 확정되었을 때에는 여자랑 교제해 본적이 없어서 어쩔 줄 몰라 당황했으며 아버지와 달리 정사(政事)에는 무관심했고 사냥에는 열중하였다. 그러자, 왕비는 자신에게 무신경한 남편대신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서 ‘마누엘 고도이’라는 왕비의 근위병은 총리대신으로까지 임명되었다.

 

사실상 정치는 ‘고도이’가 쥐락펴락했으며 왕은 사냥에나 열중하며 놀기에 바빴고 그에 따라 ‘고도이’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1808년 스페인 국민들은 총리인 ‘마누엘 고도이(Manuel de Godoy y Álvarez de Faria)’와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 그리고 무능한 왕의 전횡과 타락에 봉기를 일으켜 왕을 내쫓았고 왕세자 ‘페르난도’를 새로운 스페인의 왕으로 옹립한다. 민중의 봉기로 스페인이라는 국가가 침몰하는 시작의 종이 울렸던 거다.

 

멀리 양인(洋人)들의 나라로 까지 갈 것도 없다. 우리의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은 1894년 동학의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民衆)의 무장 봉기이다. 조선의 양반과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8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부패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의 혁명적 거사를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농민 운동 진압 이후 결국,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이 되었던 거다.

 

지금도 더러 고창이나 정읍 변방의 들판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피 흘리며 산화한 그 역사의 현장 근처를 자동차로 지나게 되면, 당장 그 자리에서 함성과 함께 전투가 벌어지며 농민군과 정부군이 피를 뿌리는 듯한 환상으로 뭉클한 가슴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오래 전에 선조들의 피와 눈물로 씻은 이 땅의 산하, 우리가 지금 그 분들의 뜻대로 제대로 조국을 가꾸면서 살아내고 있는 지를 생각하면 차마 고개를 들기 어렵다. 그 모두가 어리석고 못난 나를 포함한 우리 민중들의 탓이지만,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본인들의 이익과 탐욕에만 눈 먼 청와대와 여의도의 그 개새들 때문에 더욱 부끄럽다.

 

최근 세계적으로 여러 국가들의 선거결과가 평범함과 상식을 넘어서고 있는데, 업적이나 사회적 평판을 한 번에 뒤집고 승자로 올라선 꼴통들이 대중의 마음을 빼앗으며 비상식적인 정치인들이 당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필리핀에서는 '필리핀의 트럼프'라는 검사 출신 시장 ‘두테르테’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또 있다. 브라질의 대선 당선자 ‘자이르 볼소나루’ 사회기독당 의원도 그러한 부류이다.

‘트럼프’나 ‘두테르테’/ ‘볼소나루’ 따위들이 인기를 끄는 배경에는 상식적인 직분 수행을 외면하고 불법과 탈법/ 갑질로 일상을 삼는 위정자들의 행태에 절망한 대중들이 그 복수의 수단으로 비상식적인 꼴통 출마자들에게 열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각종 정보매체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상류층과 정치/ 검찰/ 경제계 인사들이 대체로 거의 타락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도덕적 타락은 ‘위장전입’과 ‘병역기피’ 정도는 필수이며 ‘탈세’는 선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재상(宰相)이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스승에게 묻자, ‘공자’ 가라사대 “정명야(正名也)”라고 설(說)했다. 정명(正名)이란 명(名)과 실(實)이 일치(一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명과 실을 일치시키는 작업들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아주 드물게 실행되었으며 근자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정과 평등을 부르짖는 지금 우리 시대의 권력자들의 행보에는 공정이나 평등 그리고 소통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이다.

 

하버드의 교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40만부 이상 팔린 것도 이러한 사정 즉 정의에 목마른 민중(民衆)의 갈증(渴症)이 원인이라는 거다. 선물로 1,000만원대의 양주/ 수백만원대의 포도주 상품/ 부장검사 출신의 100억대의 변호사 수임료라는 뉴스는 우리 시대의 정의(正義)가 그 금도를 이미 넘어서 있음을 의미한다. 권자와 부자들이 주고받은 고가의 선물은 그 자체로써 이미 불법(不法)이다. 그리고, 그 불법에 불평등의 요인은 분명코 존재한다.

정의(正義)는 법을 만들고 지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지도자들의 치열한 자기절제와 일반 구성원에 대한 양보의 미덕으로만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이토록 대중(大衆)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 야만(野蠻)의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정의(正義)’를 되찾는다면, 그것은 분명코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한 ‘상식적인 신념(信念)’으로 무장된 정치인과 관리들의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