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토) 오후 4시.
내가 광화문광장에 도착하겠다고 정해둔 시간이 오후 7시이므로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물론, 어느 그 누구도 그 시간에 오라거나 좀 더 일찍 오거나 좀 더 천천히 와도 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내가 정한 골든타임인 거다. 그러나, 아직 4시인데도 왠지 마음이 바빴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8800번 서울역행 직행버스에 올랐다. 지난 주 토요일(11월/5일)에는 남산 1호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더 이상은 갈 수가 없게 되었다면서 오리엔스호텔 인근의 길가에 버스가 승객들을 모두 하차시켰지만 오늘은 터널을 통과만 해도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빠르게 질주한 버스는 판교IC를 스치고 지나 달래네고개를 거칠게 타고 넘어 만남의 광장을 거쳐 반포IC도 마저 지나며 별 문제없이 고속도로 끝단을 통과하여 한남대교위에 올라탔다. 여기까지 무난하게 달려 온 버스는 한남동 이탈리아대사관앞의 정류소에서 “더 이상은 갈 수 없으니 모두 하차해 주시라”며 하차시켰다. 승객들은 예상했다는 듯이, 아무도 군소리없이 모두 버스에서 내렸다. 오늘 역시도 터널을 통과만 해도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었는데, 불길한 예측은 대부분 맞는다더니 터널을 저만치 앞에 하차했던 거다.
터널을 앞 둔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모여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터널을 통과해야 할 촛불항쟁의 전사들이었다. 그 뒤로도 버스들은 도착과 동시에 사람들을 모두 퍼 내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새초롬하게 떠났는데, 물정모르고 뒤뚱거리고 달려 온 어느 버스 한 대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몰렸는데 그 기사는 대놓고 “더는 못 간다.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내릴 사람만 타라~!!”고 외치며 종주먹을 들이대자 “오냐. 두 말하면 입 아프다. 그러고 말고~!!ㅇ.ㅋ.~" 라는 듯이 사람들이 우르르르 올라탔던 거다. 이제 더는 그만 타라며 버스는 인파를 밀어내고 뿌리치며 터널을 향하여 힘겹게 오르막을 향하여 출발했다.
금방 터질 것처럼 배가 탱탱했던 버스는 터널을 통과하고 오리엔스 호텔을 지나 좌회전으로 명동역 입구에 도착하자 모든 승객들을 토해냈다. 평소라면 1시간이내에 도착할 것인데 오늘은 2시간이 이미 지나있었다. 소년기와 청년기의 추억으로 항상 그리웠던 명동은 평소처럼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곳에는 평화와 자본/ 쾌락과 희열이 넘쳐나고 있었다. 인파속을 스치며 바삐 걷자니 배가 고팠다. 식당과 햄버거하우스도 미어터진다. 급한대로 길거리마차에서 소시지꼬치를 한 줄 사서 입에 물고 걸었다. 오늘 예전 격전의 전우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있었지만, 가버린 시절을 다시 불러오고 싶지는 않았다. 추억은 추억으로써 그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퇴계로를 제외한 청계천로/ 을지로/ 종로/ 광화문의 중심가는 엄청난 인파로 뒤범벅이었다. 광화문에 도착하니 전투는 이미 큰 파도가 한바탕 지나간 상황이었다. 교보문고 앞/ 이순신 장군 동상 앞/ 세종대왕 동상 앞 등 여러 개의 대형무더기로 나뉘어 전투가 아닌 문화제로 바뀌어 있었다. 대형문화제 몇 군데를 뚫고 지나가 광화문 교차로 대로에 섰다. 광화문을 바라보고 좌측 방향 청와대 정문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효자동 삼거리로 통하는 좁은 길,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으로 통하는 그길 뿐 아니라 경찰버스가 사람 한 명도 통과할 수 없도록 기가 막히게 바짝바짝 차를 붙여 주차하여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 길로 행진할 수 없다면 통의동우체국을 통하여 효자동주민센터가 바라보이는 대로밖에는 없다. (그 주민센터 가기 전 첫 번째 골목이던가. 일본식 카레를 기가 막히게 잘하던 카레집이 있었는데..) 주민센터를 바라보면서 행진하다 중간 중간의 골목길을 기습적으로 내달려 청기와집 정문앞으로 도달할 수는 있지만 지금이 어느 시절인가 경찰이 그렇게 만만하게 비켜 서있겠나. 골목마다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광화문 앞에서 부터 엄청난 인파를 뚫고 자하문로 입구 촛불부대의 대치선 최전방 20미터 앞까지 뚫고 도착했다. 바로 눈앞에 경찰이 쳐 놓은 엄청난 높이의 바리케이트가 보였다.
경찰이 들고있는 검은 방패를 보면 피가 끓었다, 나도 모르게... 예전에 소싯적에는 대치선 최전방에서 경찰의 방패들과 마주 대치하고 서있었기 때문에 함성과 스크럼으로 밀었다 물러섰다 밀었다 물러섰다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에 있는 힘껏 밀어붙여 경찰의 방패막을 허물고 허물어진 부분으로 물밀 듯이 밀고 들이쳐 순식간에 경찰의 저지선을 무력화시켰던 거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쳐진 바리케이트의 높이와 무게감을 쳐다보니 이건 쉽게 무력화될 물건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졌다!” 싶은 마음이 앞서며 헛웃음이 나왔다.
대치선 최전방의 전사들은 “경찰 비켜라~!”“경찰 퇴근해~!”“박근혜는/ 하야하라~!”“박근혜를/ 구속하라~!”를 반복적으로 외치며 저지선 돌파를 엿보고 있었지만, 최전방 대치선의 군중은 대략 만여명 정도.. 그 정도의 세력으론 부족하다고 보였다. 저 물건을 돌파하려면 현재의 인원으로는 과부족이다. 평화적 문화제만이 답으로 보였다. 여차직하면 합세하여 청기와집 정문앞으로 박근혜를 불러내려고 했지만.. 그동안 응어리진 마음속의 구호를 목 터지게 외치며 노래를 부르곤 세력속에서 조용히 물러나왔다. 목 터지게 외친다고 하여 어디 응어리진 나를 포함한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풀리겠는가...
《산띠아고에 비가 내린다: It Is Raining on Santiago》는 영화가 있다. 1975년에 프랑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우리나라에선 딱 한 번 놀랍게도 1988년 노태우정권 시절에 더구나 KBS에서 방영된 적이 있는 영화이다. 1973년 칠레의 역사적인 군사 쿠데타, 남아메리카 대륙 칠레의 수도 산띠아고의 라디오에서는 "오늘은 산띠아고에 비가 내립니다."라는 방송을 반복적으로 내보냈다. 그것은 군부가 보낸 쿠데타 신호의 암호였다. 쿠데타가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핍박받으며 죽어나가는 국민들의 아픔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언젠가는 그 맥을 끊어야만 하는 군부쿠데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박정희가 이룬 그 쿠데타의 종식/ 그 화려하게 꾸며진 위장막의 기나 긴 종말에 서있는 여자 박근혜의 좌절이 기나 긴 쿠데타의 종말을 보여주게 될 것만 같다. 원래 착한 자의 종말은 단순하다. 그러나, 영화를 봐도 나쁜 놈이 뒈질 때는 그 시간을 엄청 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괴롭게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 비 백~!”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보여주면서 뒈지는 경우도 본다. 내가 고딩의 주제에 어느 날 대학생들과 함께 모임을 갖던 중 어쩌다가 “아, 쓰바.. 유신헌법 철페해~!”를 외친 바람에 본의 아니게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던 시절부터 계산하여 본다면, 유신독재의 시작부터 금년까정 꼭 43년이 흘렀던 거다. 5/16 쿠데타부터 따지면 더 길다. 좌우간, 이제 마침내 군부독재/ 짝퉁 보수의 진짜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거다.
잡아먹으려고 했던 나귀의 뒷발바닥에 박혔다는 까시를 빼주려다가 나귀의 뒷발질에 아구통이 죽사발된 늑대의 어리석음과 유사한 박근혜의 엉터리권력은 새삼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속은 우리가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워낙 각종 미디어가 시시콜콜 다 이야기했기에 동네 강아지도 순시리를 안다. 물론, 그 강아지도 순시리가 우리 동네 강아지중 한 마리의 이름인줄 알겠지만 말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 ‘김영철’씨가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라고 말한 대사는 각종 패러디로 난무하고 있지만, 그네가 순시리가 딸 유라가 우리에게 준 모욕감은 정말 그 니~언들의 귀싸대기를 호랑이가 개 뺨치듯 후려갈겨도 속이 안 풀릴 지경이다.
속은 우리도 우리지만, 알고도 눈감고 귀막은 ‘새누리당’의 친박일족들은 이제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궁형과 함께 멸문지화를 당해도 싸다고 본다. “피땀 흘려 만든 당~” 운운하며 단식투쟁을 하면서 까지 박근혜와 당을 지키려 했던 이정현 대표의 충심도 돌아보니 어리석기만 할 따름이다. 이제는 이정현대표의 그 말투까정 느글거리는 것만 같아서 듣기에 역겹다. 사건이 터진 날로부터 지금까지 지난 시간이 얼마인데.. 아직도 당권투쟁 눈치다툼으로 국민들에게 올바른 이정표를 내놓지 못하는 야당개새들도 다 똑같은 족속들이다. 재인이나 철수는 어차피 마바리인 줄 알았지만, 재갈공명 못지않은 영통한 인물이었던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이 저렇게 감을 잃어버릴 줄은 몰랐다. 안타깝다. 권력이란 정말 공허한 것이다.
《아노말리사: Anomalisa》라는 영화는 2015년에 공개된 허리우드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어느 한 남자의 긴 밤 동안 펼쳐지는 꿈같은 여행이 호텔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진다. 어느 한 남자 마이클은 그곳에서 리사라는 여자의 아픔을 마주하고, 그녀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특별한 사람임을 깨닫게 되고, 둘은 처음 느껴보는 사랑에 빠지게 되며 뱃살 나온 쳐진 몸뚱이와 흉터마저도 서로에겐 매력일 따름이다. 하지만, 설레임으로 시작된 둘의 사랑도 반복되면서 흥분이 가라앉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리사의 목소리 역시도 맥작없이 평범해져만 간다.
수작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로 데뷔한 ‘챨리 코프먼’이 만든 이 영화는, 중년의 고독과 권태/ 불륜/ 공허한 삶/ 자아 찾기 등이 주제이다. 주제를 위하여 영화는 애니메이션답지 않게 심지어 베드신까지도 정교하다. 사막같은 삶 속에서 만난 오아시스같이 특별한 사랑도 시간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여전히 권태로운 삶속에서 반복되는 사람들과 둘러보면 질식할 것만 같이 한결같은 사막일 뿐이다. 영화는 많은 것들을 돌이켜보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과 관계에 대하여/ 산다는 것에 대하여/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들여다 본 이 영화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영화같은 현실이 던져주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권력과 돈, 박근혜와 최순실의 이야기는 어느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하다. 제기랄, 국민이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이 영화는 정말 못됐다. 주연과 조연 여자 둘 다 악질이라 쉽지 않으며 긴 싸움이 되겠지만, 이 영화같은 현실은 이제 끝장내야만 한다. 전라도 남원의 윗동네에 ‘오수’라는 작은 마을이 실제로 있다. 그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수의 개’는 불구덩이에서 잠들어있는 주인에게 충성하며 주인을 위하여 몸을 강물로 적셔 불구덩이에 뛰어들면서 그 개는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불을 끄다 죽었는데.. 지금 주인에게 국민에게 충성하지 못하는 이 여자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국내외 안밖으로 힘겹기도 하지만, 추운 겨울을 앞 둔 지금 우리가 맞이할 이 겨울이 유난히 추울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