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란, 스스로와 자신의 조직(공동체)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남다르고 주도면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이다. 그리고 그 주도면밀한 관찰의 결과로 타인을 설득하여 본인의 꿈을 직접적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라야만 한다.
원래 지구상에는 다른 유인원들도 존재했지만, 호모사피엔스만이 다른 인종들을 멸종시키거나 포용하여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우뚝 선 이유에는 호모사피엔스가 집단생활을 꾸릴 줄 알았으며 나름의 조직적인 시스템을 먼저 수립하였던 거다.
마침내, 조직적 질서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지도자는 언제나 창조력을 갖춘 소수였으며 조직원들로부터 본인의 인격과 존재감/ 복잡한 설득의 기술을 통하여 신뢰를 획득하며 결과로 얻은 권력을 쥐고 조직체를 총괄한다. 또한, 지도자란 자신의 조직인 공동체를 리딩하여 어떤 길을 선제적으로 체험하여 겪고 난 후에 실질적인 지혜를 체득해야만 했던 거다.
신라는, 시조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 서나/ 서야/ 서라/ 서벌 등으로 불렀다고 하며 그 모두는 마을을 뜻하는 사로로 해석된다는 거다. 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통일신라는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인 성덕왕(702∼737)때 극성기(極盛期)를 맞이하였으며 통일 후 120여 년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 오늘날 안압지/ 임해전/ 포석정 등 당시 상류사회의 여유롭고 호화로운 모습을 전하여 주고 있다.
신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승승장구하였고 수많은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으나,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았던 선덕/ 진덕여왕과 달리 진성여왕이 자신과 염문을 뿌린 각간 위홍이 죽자 그에게 대왕의 호칭을 내리는 등의 자기 사람 챙기기와 사생활 문제로 꾸준히 구설에 올랐다.
게다가, 서쪽으로는 견훤이/ 북쪽으로는 궁예가 반란을 일으켰기에 결국 신라는 오랜 빛나는 역사를 끝내고 멸망했다. 결국, 진성여왕이 신라를 망하게 한 단초는 각간 위홍 한 사람과 만의 소통이 문제였다.
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계 카자르 족의 모하마드가 잔드 왕조의 카림 칸이 죽은 후 독립하여 창건한 왕조이며 테헤란에 수도를 두었다. 그러나, 1912년에는 정식으로 영국·러시아의 이란 분할 협정(分割協定)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반(半)식민지화 되었다. 그후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혼란을 수습할 수가 없어 1925년 국민 의회에 의해서 폐위되었다
뒤를 계승한 팔레비 왕조는, 팔레비가 건국하여 이란의 이권을 회수하고 근대화 운동을 펼쳤지만 팔레비 왕조의 왕실은 지나친 사치와 친서방의 진보적인 나라였다.
이것을 반대한 이슬람계 보수파는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란·이슬람혁명을 일으켰는데 그 결과 팔레비 왕조가 멸망하고 신정제가 확립되었다. 나도 그 시절 이란에서 호메이니 일파의 혁명적 변란 한 복판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었다. 결국, 팔레비 2세가 낙마한 결정적인 이유는 국왕의 외골수 사랑과 그 결과로 따른 왕비의 지나친 사치가 문제였던 거다.
고려의 여러 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왕은 단연코 태조 왕건 그리고 공민왕일 것이다. 31대 왕인 공민왕은 한마디로 개혁군주로 봐야 한다. 엄중한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한 공민왕은 과감한 개혁정치를 펼쳤으며 왕비 노국공주만을 사랑한 군주였다.
원나라가 망하자 주원장의 명나라와 합세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긴 영토도 수복하는 둥 대외적으로 여러 업적을 이루었으며 개혁의 파트너로 영입한 신돈과 함께 대내적으로 그릇된 정치도 바로잡았다. 귀족의 토지는 소유자에게 반환시켰으며 불법적인 방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은 해방시키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왕비인 노국공주가 난산 끝에 사망하자 공민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절망하였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외에 여색을 즐기지 않아 후사가 없었던 거다.
그런 어느 날, 조정의 대신들이 공민왕의 후사를 잇기 위한 방편으로 잘 생긴 남아들을 수백명 선발하여 자제위를 설치하였다. 자제위들을 통해 후궁들을 억지로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는 계획이었다.
그 중에서 공민왕이 총애하던 잘생긴 미소년 홍륜이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와 사통하여 임신을 시켰으며 이후 후궁 익비는 임신을 하게 되고, 공민왕은 익비가 낳을 아들을 후계로 삼아 왕위에 올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공민왕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과 이러한 비밀을 아는 환관 최만생을 없애고자 결심한다. 임신한 익비의 태아는 공민왕의 완전한 혈통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리 눈치를 챈 홍륜과 자제위 청년들은 미리 공민왕의 침전에 들어가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고 있는 공민왕의 온몸을 칼로 마구 찔려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 요즘은 뉴스를 보기가 참으로 겁난다. 하루 종일 기승전 최순실이며 닥치고 박근혜이다. 택도 없는 될 성 부르지않은 의혹들은 시간과 함께 사실로 증거된다. 내가 학창시절에 부르던 군가 한토막.. “우리들은 이 몸과 마음을 바쳤나니~ ”가 떠오른다. 어떤 이는 오죽하면, “순실이를 퍼뜩 석방하라. 오더를 받지못해 하야를 못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문구의 피켓을 들고 촛불항쟁에 나섰겠는가.
《내가 아직도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내 발밑에서 물결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아무도 살지 않는 강변에 사는 것은
실패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라는
죽은 새들의 정다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일이었나니
내가 아직도 바람 부는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날아간 하늘에 햇살이 빛나기 때문이다.》
----- 갈대/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