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마른 잎들이 매달린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달이 창백하게 떨고 있다. 그 달빛과 나뭇가지 사이의 어둠속으로 새 한 마리가 높은 소리로 울면서 멀리 날아갔다. 이름모를 새의 울음소리 끝에서 파도소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바닷가의 민박집이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비온 뒤 산하에 걸려있던 안개가 흐르고 달빛 속으로 끼륵거리며 기러기가 날아가고 청명한 신새벽 숲속에서 맡았던 그 향기로운 솔내음 눈감으면 떠오르는 갈대밭의 눈부신 흐느낌과 금강하구둑에 까맣게 내려앉으며 명멸하며 번득이던 수많은 비늘의 새떼 그리고 새떼들...
어쩌면 잊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바쁘다는 핑계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돌아볼 시간과 필요의 낭비가 싫어 애써 잊으려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찾아 온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아쉬움 그 속에 깃든 작지만 소중한 추억조차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닫고 멍한 시선으로 후회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 해를 떠나보내는 시간이 되니 잠시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시계바늘처럼 어김없이 맞추어 휘몰아치는 현실을 잠시 뒤로 하고, 휴가를 얻어 산속 휴양림이거나 펜션이라도 좋고 평범한 바닷가의 민박집이라도 좋겠다. 밖은 눈보라와 바람소리가 서늘하지만 낯설지 않은 친척들이거나 친한 친구들 몇몇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따뜻한 실내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 주변에 들리는 소리라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때때로 조그만 불꽃이 피시식 튀어 오르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맥주이거나 막걸리를 목 넘기는 소리/ 누군가가 끓이고 있는 보글보글 찌개가 끓고 있는 소리뿐 온 몸은 그저 평온하고 나른하여 아무 생각도 없는 그 뿐인 거다.
북유럽인 덴마크에서는 이런 소박하고 평온한 느낌 즉 긴장을 풀어도 되는 행복한 느낌을 ‘휘게’라고 부른다고 한다. 덴마크는 여러 차례 유엔 ‘행복보고서’의 국민행복지수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한 나라다. ‘휘게’라는 단어는 덴마크에서 일상적인 인사말로 쓰인다고 한다. 정부의 여러 가지 복지 정책으로 돈이 크게 많지 않아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며 혼자일 때보다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일 때 행복은 더욱 증폭된다는 거다. 부탄이라는 가난한 나라 또한 덴마크 못지않게 행복지수가 높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세계 58위 정도이다. ‘휘게’는 고사하고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혼밥’이거나 ‘혼술’의 현상은 치욕스럽다가도 화가 날 지경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유독 온 나라가 격랑에 휩싸여있으며 우리들은 날마다 엄청난 정치경제적인 뉴스에 놀라면서 지내고 있고 생활이 나아지기는커녕 날로 전망이 어둡다. 정말 외면하고픈 현실을 등지고 산속 깊은 곳에라도 들어가 조용하고 따뜻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도시인으로 살면서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어찌 나 혼자만이랴. 도시쥐로서 직장인으로서 열정적으로 일하며 만족감도 느꼈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휘게’와 같은 삶의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음이다. 생활의 터전인 도시에 존재하면서 마음은 시골과 산속에 두고 있으며 떠나지 못하는 자의 미련이 항상 존재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글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에서 영감을 받은 ‘임철우’의 <사평역>이라는 그 짧은 소설의 시작 부분이다. 기차라는 삶의 시간이 나그네에게 주는 미덕이라면 오직 기다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 날 언젠가 잠시 머물렀던.. 간이역에서 기차는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왔었다. 영판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고즈넉한 풍경 속으로 거창하게 불끈 쿵쾅거리며 헤치고 달려 들어온 기차는 씩씩거리며 담박질을 멈추었지만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별반 짜드락 없는 거다. 괜시리 멋쩍은 기차는 잠시 멈칫 주춤거리더니 이내 개의치 않겠다는 듯이 겨울들판의 풍광 속으로 휭하니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그리고 얼마 후, 소설속의 이야기처럼 창밖으로는 제법 주먹만한 송이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 막차라도 좋겠다. 지난날의 그 날처럼 그 송이눈 속으로 기차를 타고 과감하게 떠날 그 날을 기약하면서 다시 한 해를 힘차게 출발하자.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 오는 해에는 작은 행복조차도 미루고 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깨달음이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하늘 아래의 모든 영혼들이 평온할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Prospero Ano y Felicid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