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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동(客冬)을 보내며

Led Zepplin 2018. 3. 8. 23:33



  내린 눈이 녹아 비나 물이 된다는 우수(雨水)를 지나고도 호된 추위를 보이던 날씨는 사흘이 멀다고 비를 뿌리더니 한 낮에는 두꺼운 옷을 입고 걷기가 부담스러울 만큼 요 며칠간은 문득 정말 봄이 찾아 온 느낌입니다. 우리말로 ‘지난겨울’을 한자로는 ‘객동(客冬)’이라 합니다. ‘객(客)’이라는 단어에는 ‘손님’ 그리고 ‘과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손님이든 과거이든 그 무엇이든 언젠가는 떠나 헤어지게 되어있는 것이 아마도 자연계의 섭리(攝理)인 것 같습니다.


젊어서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휑하니 빈 들판을 홀로 유유히 걷는 것을 즐기기에 겨울을 가장 좋아하였으나, 언젠가부터 나이가 들면서 봄이 그렇게 신비롭고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요 며칠의 따사한 봄기운에 들떠 오르는 마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남도의 해 묵은 인연들에게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한겨울 내내 핸폰에 문자 한 톨의 소식도 없던 자가 봄바람만 불라치면 슬그머니 전화를 드리기엔 자못 송구스럽지만, 이미 들떠오른 가슴은 괘념치않고 대뜸 뻔뻔해 집니다. “스님, 날이 많이 따시지요?”하는 고매화에 물이 오르느냐는 뻔뻔남의 질문에 “아직은 멀었지~.”하는 답변이 대부분입니다. “전혀 기운이 없나요?”라는 거듭된 질문에 언제나 그러하듯 뻔뻔남에 대한 미움은 그새 지우시고 “산수유에는 쪼맨한 꽃망울이 움은 트고 있더구만~!”하는 마지못한 화답입니다. 그 ‘쪼맨한 꽃망울’이라는 말씀에도 매화꾼 뻔뻔남의 마음은 모처럼 겨우내 움추렸던 설레임을 맛보며 입가엔 썩은 미소가 떠오릅니다.

 

   단발머리 소녀가/ 웃으며 건네준 한 장의 꽃봉투

   새봄의 봉투를 열면/ 그 애의 눈빛처럼/ 가슴으로 쏟아져오는 소망의 씨앗들

   가을에 만날/ 한 송이 꽃과의 약속을 위해/ 따뜻한 두 손으로 흙을 만지는 3월

   나는 누군가를 흔드는/ 새벽바람이고 싶다

   시들지 않는 언어를 그의 가슴에 꽂는/ 연두색 바람이고 싶다

                                                                                                    -----    3월에 / 이해인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오래 전 옛 선비들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엄동설한의 긴 겨울과 추위를 견뎌냈다는 겁니다. 동짓날이 되면, 창호지에 가득 하얀 매화꽃 81송이(9X9)를 그림 그려 벽이나 창문에 붙여놓고 하루에 한 송이씩 날마다 빨갛게 색칠을 해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짓날로부터 81일이 되어 매화꽃 그림이 모두 붉게 색칠하여진 날에는 남으로 난 창문을 활짝 열면 진짜 매화가 뜰 앞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풍류라 아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 등걸에서 피어났을지라도 고결한 정신의 맑은 기품을 연상케 하는 고매화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상징하는 청렴의 꽃이라 해도 무리가 없지 않겠는지요.

 

탐매여행(探梅旅行), 2월말로 부터 시작하여 4월의 중순까지 고목의 등걸에 보석처럼 매달린 매화를 쫒아 봄나들이를 떠나는 흥분은 참으로 경쾌합니다. 그 여러 그루 중의 으뜸인 ‘고불매’는 전남 장성의 고찰 ‘백양사’에 있습니다. 분홍빛을 띄는 홍매화이며 350년 수령의 천연기념물로써 그 향기는 가히 천국의 향취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습니다. 경내의 한 편에 자리하고 있지만, 백양사 앞 쌍계루의 호수까지 그 향기가 후각을 마비시킬 지경입니다.

 

또 하나의 으뜸으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의 오른 편에 키가 큰 ‘흑매’ 한 그루가 있습니다. 섬진강 물길 따라 거슬러온 봄바람이 노고단 자락으로 오르다 숨 한번 고르고 나서 오래된 옛 나무 등걸에 고운 손길로 어루만져 피워내는 꽃으로 이끼 낀 등걸이 부끄러움으로 말은 못하고 붉다 못해 검붉은 꽃 홍매로 피워 낸 그 붉은 색이 너무 진하여 흑매가 된 꽃으로 직접 보지않고는 그 아름다움을 무엇이라 표현하리까. 숙종 때 계파선사(桂波仙師)가 심었다는 300년이 훨씬 넘은 나무이지만 나무도 꽃도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서울 ‘창덕궁’의 ‘만첩홍매’는 창덕궁안 내의원 자시문 앞에 있는 것으로, 나이는 400년 정도이며 선조 때 명나라에서 받은 것으로 분홍색의 겹꽃이며 그 꽃잎이 크고 대단히 화려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명품입니다. 한반도의 고매화중 Best Of Best를 꼽으라면 서슴치않고 위와같이 향(香)으로는 ‘고불매/’ 색(色)으로는 각황전의 ‘흑매’/ 그 태(態)로써는 ‘만첩홍매’를 단연 꽃중의 꽃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청정심(淸淨心)의 맑고 고고한 향과 색 그리고 태를 종합적으로 본다면 역시 백양사의 ‘고불매’가 고매화 중의 고매화/ 매화 중의 매화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이 비가 그치면 다시 봄이 옵니다. 지난겨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듯이, 바다로 한 번 흘러간 한강의 물이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네 인간의 삶도 한 번 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죠. 아침에는 푸른 실(靑絲)같던 검은 머리카락이 저녁에는 흰 눈처럼 백발이 되고 마니 사람의 삶이란 이렇게 허무하도록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지나온 삶에서 ‘봄’이라는 이름으로 간직된 책속의 추억에는 어떤 그림들이 정렬되어 있는지요. 색이 고운 날실과 씨실로 짜여진 아름답고 따사로운 봄날이 되시옵기를 진실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