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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

Led Zepplin 2018. 7. 21. 21:37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한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 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즐거운 편지 / 황동규

 

   한석규/ 심은하가 주연한 영화〈8월의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첫사랑과도 같은 영화이다. ‘초원사진관’이라는 작은 사진관을 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정원은 자신이 시한부인생임을 알고 있지만 그의 일상은 담담하고 평온하다. 그런 어느 날, 정원은 생기발랄한 주차단속원 다림을 알게 되고, 시간이 흐르자 미세한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그러나, 정원은 사랑을 하기에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림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초원사진관'은, 원래는 차고였던 곳을 헐고 사진관을 지었으며 작업의 용이성을 위해 현실의 공간보다 세트를 더 크게 짓지만 실제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최대한 현실감을 살려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촬영 현장에는 마치 연극 무대처럼 마을 사람들이 사진관 앞에 모여 사진관을 구경하였으며, 리얼한 외양 때문에 촬영하는 동안 가끔 진짜 사진관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들어와 증명사진을 주문했다고 한다.

 

영화〈8월의 크리스마스〉의 원래 제목은 “즐거운 편지”였다. 그런데, 당시 이미 개봉한 영화 〈편지〉가 히트하여 제목을 황급히 바꿔야 했으며 ‘8월’은 그들이 만나게 되는 시간적 배경을 의미하고 ‘크리스마스’는 1년 중에 뜻 깊은 선물을 받는 날임을 착안하여 정원에게 다림과의 만남이 선물을 의미하게 되는 거라는 의미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영화〈편지〉와 〈8월의 크리스마스〉는 둘 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영화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전북 군산에서 많은 부분이 촬영되었다. 군산이라는 곳은 내게는 어머니의 고향이며 젊은 날 한 시절 군산세관에서 근무하셨던 아버지의 체취가 묻어있는 곳이다. 젊은 날 옷을 사러 나오신 어머니가 기웃거리셨을 중심가 영동의 옷가게 거리이며 멀리 있는 친구나 선후배에게 또는 먼 친척 어르신에게 편지를 부쳤을 예전 그 자리에 리빌딩으로 서있는 우체국.

그리고 아직도 일제시절 부터의 고풍 가득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군산세관 본관의 현관 출입문 도어의 손잡이.. 그 옛날 지금은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아버지가 날마다 열고 닫으며 붙잡고 드나드셨을 그 손잡이는 내가 아버지의 손길이 그리울 때이면 문득 찾아가서 내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며 잡아 볼 수도 있는 곳이다.

 

나는 간혹 마음이 시끄럽고 삶이 무기력할 때이거나 지루하여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문득 차를 달려 군산으로 향한다. 비린내 진동하는 비릿한 포구를 둘러보고 일제가 만들어 놓은 뜬다리가 아직도 개펄위에 우뚝 서있는 예전 군산항 자리에 서서 얼굴 가득 바닷바람을 맞으면 가슴이 서늘해지며 아련해진다. 겨울이면 채만식 선생의 ‘탁류’를 떠올리도록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던 금강하구가 생각나기도 하고 밤이면 하구에 떠있는 배들이 밝히는 등불과 저 멀리 어촌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다보면 도시에서 얻은 삶의 고단함과 환멸도 잠시 녹아드는 기분이 든다.

 

바닷바람을 쏘이고 나면 서늘해진 가슴을 안고 시내에 들어선다. 시내의 곳곳에서 한석규와 심은하가 다녔던 거리와 마주친다. 그 좁은 거리에서는 한석규가 오토바이를 타고 스쳐 지나가고 심은하가 주차단속을 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거리는 아직도 60~70년대의 골목과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군산의 구거리이며,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군산의 골목 곳곳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도 즐비하다. 유명인사들이 살았던 건물도 많지만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골목의 풍경은 정겹기까지 하다. 얼마 전에는, 위치는 조금 바뀌었지만 영화에 등장하였던 정원의 ‘초원사진관’이 재연되어 반가웠다.

 

아버지는 내가 2살 무렵에 돌아가셨다. 아직 젖도 떨어지지 않은 나를 데리고 고향과 멀리 떨어진 인천에서 젖먹이인 나를 늙은 유모에게 맡기고 삶을 일구어야 했던 어머니를 나는 우여곡절 끝에 훗날 사춘기에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의 고향인 군산을 오고가면서 나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책을 읽었고 사랑을 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더욱 영화 속에서 정원이 남긴 대사를 나는 뭉클하도록 잊을 수가 없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에게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