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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의 거룩한 식사

Led Zepplin 2018. 11. 27. 17:49



  11월이 저물면서 가을이 부쩍 무르익어 겨울의 문턱인 12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얀 목련을 올려다보면서 새롭게 만난 봄에 감사하던 마음도 그리 오래 전 기억이 아닌 것 같은데, 첫 눈이 오신 이후로는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둑한 퇴근길, 켜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나간 시절들의 옛노래들은 아련한 감상 속으로 젖어들게 합니다. 사랑 또한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또 다른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까닭도 없이 서글퍼집니다. 시간이 흐르면 또 다시 과연 어떤 일과 인연들로 올 한 해를 추억하게 될런지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 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날마다 조금씩 바람의 온도가 차가워집니다. 차가워진 바람속으로 외로움도 찾아옵니다. 영화에는 경우에 따라 여러 종류의 외로움이 녹아 들어있습니다. 그 외로움은 현실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거나 스스로와의 투쟁으로 자기를 외부와 단절시키거나 또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고립되기도 합니다. 그 경우, 카메라는 각각의 캐릭터들이 어떻게 다른 캐릭터와 함께 반응하고 작용하는지를 다만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 고립된 외로움은 슬픔이거나 고통이거나 변화된 감정을 발생하기도 합니다. 관객은 그 외로움을 자신과 오버랩시킴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는 동기를 유발합니다.

 

한 남자가 홀로 대자연에서 살아남는 분투기를 그린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2000)》는 인간의 고립을 그린 영화 중 단연 두각을 나타냅니다.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1985)》를 만든 스타감독 ‘로버트 저메키스’가 감독을 맡았으며, 믿고 봐도 좋은 배우 ‘톰 행크스’가 원톱으로 문명으로 부터 완전히 단절된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를 연기합니다. 주인공 ‘놀랜드’가 정신력의 한계와 맞닥뜨리는 힘겨운 투쟁을 보며 우리는 당연으로 여기던 일상에서의 편안함에 안도하게 됩니다.

 

인간의 고독을 다룬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2000)》는 대자연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생존 투쟁기를 그린 우리들의 초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문명으로 귀환한 며칠 후, ‘놀랜드’는 자신이 끝까지 챙겼던 소포를 주인에게 직접 전해주러 시골 교외의 외딴집에 도착하지만 집주인이 부재중이라서 그 택배물에 “이 소포가 저를 살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척 놀랜드”라는 메시지를 남긴 뒤 돌아섭니다. 돌아 서 나온 너른 벌판의 큰 길 사거리에서 어디로 갈지를 궁리하고 있는 ‘놀랜드’의 얼굴을 Close Up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의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갈 것인가는 각자에게 달린 거라고 봅니다.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황지우/ 거룩한 식사

 

이 만추의 계절에 우리들이 달려 온 길에 대하여 반추(反芻)해 보고 싶습니다. 슬픔과 아름다움 그리고 고통과 행복과 즐거움이 있었던 우리들의 삶을 말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나머지의 삶에서.. 뛰어난 재능과 능력은 없을지라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좋은 헛헛하지만 자유로운 늑대로 살고 싶습니다. 어느 누군가에게 이리저리 쫒겨 다니는 잡견이 아니라, 비록 외로울지라도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 속을 헤쳐 나아가며 눈비가 오시면 웃으며 눈비를 즐기면서 홀로 우뚝 선 하얀 늑대로 말입니다. 목양자가 오시기만을 목 놓아 기다리는 길들여진 양이 아니라 자기만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한사코 길들여지지 않는 광야의 늑대로 살고 싶습니다. 응? 뭐라구? 그만 졸고.. 입가에 침 닦고 가스렌지 불 끄라구? 라면이 끓어 넘치고 있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