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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송의 시간

Led Zepplin 2018. 12. 25. 23:06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마신 술의 숙취로 잠이 깨어 일어나 물을 마시고보니 시간은 새벽 4시를 조금 지났습니다. 학창시절, 크리스마스이브의 자정미사를 마치고 나면 학생회 회원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야식을 먹고 잠시 잡담을 나눈 이후에 우리들은 예년처럼 조를 나누어 새벽송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주 멀리 그 시절로부터 떠나 온 이후의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멀리서 들려오는 새벽송을 듣고 베갯머리에서 감회에 오래 젖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미 2018번의 생일상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도 우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어 축복과 사랑을 주시고 있음이 정확한 것인지 이 신새벽에 문득 그런 의문이 듭니다.

 

목양자의 은총과 축복은 언감생심으로 사양하고 부정부패와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폭력과 천재지변만이라도  제대로 심판을 내려주시기만을 눈깔 빠지게 기다리다 지쳐버린 현실 속에서 시인 오규원 선생의 말마따나 어차피 이왕 잘못 살았다면 계속 잘못 사는 것도 삶의 그 한 방편은 아닐지 그러지 않아도 쓰린 속을 쓴 커피 한 잔으로 쓸어내리면서 곰곰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축복과 사랑으로 어느 누군가의 인간이 그 은덕으로 배가 터졌다는 소식은 좀체로 들리지 않지만, 오히려 인간들의 세속에서 그 비슷한 감회어린 소식은 종종 들려옵니다.

 

신(God)도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사랑과 축복을 상징하는 단어에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있음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19세기 초 프랑스의 정치가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의 ‘Noble’(귀족)과 ‘Oblige’(준수하다)의 합성어로서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솔선수범하여 그 지위와 신분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습니다. 초기 로마 귀족들은 솔선수범하여 16년간이나 계속된 포에니 전쟁에 참가하여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싸웠고, 이 전쟁에서 로마의 최고위 관직인 집정관(Consul) 13명이 전사하였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귀족들이 사재를 들여 공공시설을 신축하거나 도로를 닦는 일이 제법 있었으며 그 건물이나 도로에 본인의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동북부 로렌 지방에는 ‘메스’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독일 국경과 가까운 이유로 1870년 무렵 프랑스가 보불전쟁에 패하면서 ‘메스’를 포함한 로렌 지방 일대를 독일에 빼앗겼습니다. 수많은 장군을 배출한 지역 명문가의 소년 ‘루이 드 모뒤’는 ‘메스’를 떠나 ‘파리’로 탈출하였습니다. 소년은 “고향을 수복하는 날까지 극장이나 캬바레 같은 곳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으며, 육사를 졸업 후 1차 대전 당시 군단장에 올라 독일을 몰아내고 ‘메스’를 탈환하였습니다. 소년 ‘루이 드 모뒤’는 마침내 시장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그 후에 비로소 극장을 출입하면서 48년 전 소년의 눈물어린 맹세를 지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현하였던 겁니다.

 

못지않게 우리나라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훌륭한 사례가 최근에 있습니다. 원로 수장가 손창근(89)씨는 지난 11월 21일.. 15세기 조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뒤 처음 펴낸 한글서적인 <용비어천가> 초간본과 조선 문인화의 걸작인 19세기 대학자 추사 김정희의 난초그림 <불이선란도>를 비롯하여 자신과 부친 손세기(1903~1983)의 소장품 컬렉션(손세기·손창근 컬렉션)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습니다.

 

기증된 목록에는 <용비어천가><불이선란도> 외에 추사의 유명한 예서글씨 편액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와 청나라 문인과의 친분을 담은 행서대련 〈함추각(涵秋閣)〉 18세기 진경산수화 거장인 겸재 정선이 마을어르신들의 장수 잔치를 묘사한 <북원수회도>를 실은 화첩/ 17세기 명필 오준·조문수의 글씨들이 들어있으며 심사정/ 김득신/ 전기/ 김수철/ 허련/ 장승업/ 이한복 등 조선후기의 유명 화가들의 그림과 흥선대원군의 인장 등 손꼽히는 고미술 명품들이 가득하는 겁니다.

 

음주운전 차량에 스러진 22살의 윤창호씨도 대단히 안타깝지만 그 죽음이 헛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던 윤창호씨의 황망한 죽음을 본 친구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윤창호법》이 만들어 졌습니다. 금년 12월 18일부터 시행된 이 법은 음주운전 사망 사고 가해자의 법정형을 ‘1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으로 강화시켰습니다. 윤창호씨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인 새벽(2018년 9월 25일) 이후로 친구 10명이 모였습니다. 고교 방송부 동기 6명과 중·고·대학 동창 4명이 그들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윤창호씨는 각별한 친구였다는 겁니다.

 

고교생 때부터 시험 때마다 요점 정리를 반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으며 공부 안 하려는 친구는 도서관으로 끌고 갔습니다. 또한, 그런 행동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혼자만 잘해도 되는 것을 그는 함께 더불어를 실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윤창호씨 카톡의 프로필 사진은 청와대 로고였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던 그는 늘 목표를 이야기하고 그에 걸맞게 규칙을 지켰습니다. 친구들이 병원에서 쪽잠을 자며 청와대 국민청원을 내고 수십 개 웹사이트에 가입해서 윤창호법에 대한 지지를 부탁한 것도 ‘창호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수없이 떠올리며 행동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윤기현씨도 아들 친구들을 보며 다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일주일을 못 넘긴다던 그는 한 달 이상을 버티다가 결국 11월 9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국회를 통과(11월 29일)한 《윤창호법》은 지난 20일 대전현충원 고인의 영전에 놓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기쁜(?) 날 신새벽에, 어딜 바라보고 계시는 지 도통 알 수 없는 목양자와 오로지 북한만이 머릿속 가득한 현실속 통치자의 외면속에서.. 《윤창호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우리들의 아름다운 청년 ‘윤창호 대통령’의 영면을 두 손 모두고 가슴 깊이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