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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춘(初春)

Led Zepplin 2021. 2. 23. 23:52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의 산사 ‘금둔사’. 고즈넉함만이 감도는 고요한 산사는 먼 길을 달려 온 나그네에게 모처럼의 힐링을 안겨준다. ‘금둔사’의 ‘납월매’는 부처님이 납월(12월/ 섣달) 견성(見性; 깨달음을 얻은 경지)하신 달에 피는 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섣달의 추위 속에 피는 절개의 상징이다.

탐매꾼들에게 이른 봄이 되면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곳 다섯 명소가 있는데 서울의 ‘비원’/ 구례의 ‘화엄사’/ 장성의 ‘백양사’/ 승주읍의 ‘선암사’/ 낙안읍의 ‘금둔사’가 그 곳이다. 이 곳들은 모두 조선시대에 한다하는 선비님들이 구중궁궐의 권자들이 시를 읊고 글을 쓰며 풍류를 즐기던 명소들이였다.

탐매자는 ‘납월매’가 쇠할 때라야만 ‘선암사’의 ‘선암매’가 성하기 시작하며 그리 멀지않은 ‘백양사’의 ‘고불매’와 ‘화엄사’의 ‘흑매’/ ‘비원’의 ‘겹홍매’ 또한 동시에 개화하지 않으므로 부득불 여러 차례의 발걸음을 해야만 탐매를 할 수 있으니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필자와 같은 떨거지들만이 즐길 수 있는 호사인 거다.

 

‘금둔사’는 규모가 작은 소박한 사찰이다. 멀지 않은 인근 조계산 자락에 으시딱딱한 ‘선암사’와 ‘송광사’가 버티고 있어 이렇게 저렇게 밀리고 있지만, 꾼들은 안다. 그 꾼은 탐매꾼과 찍사를 이름이다.

고매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금둔사’는 보물과 같은 사찰이니 마침내 그 긴 겨울을 끝내고 봄의 시작이 열리고 있음을 일깨워줌이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진작가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터. 게다가, 고매화는 20대의 눈먼 눈으로는 그 꽃이 잘 보이지 않으며 나이 60이 넘어 흐린 눈빛으로 봐야만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납월매’는, 제주도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가장 먼저 피는 매화로 대단히 아름다운 홍매이며 그 향이 진하다.

정유재란(1597) 때 가람이 전소되어 오랜 세월 ‘금둔사지’로 남겨진 폐사지였으나 70년대 후반 태고종의 종정이시자 조실이신 ‘지허’스님께서 길을 닦고 돌을 쌓아 절을 다시 세웠다. 산 아랫마을 낙안읍성에서 얻어 오신 600년 묵은 노거수의 한 움큼 씨앗 중에서 6개가 살아남아 꽃을 피운다.

 

‘금둔사’는 홍매로 유명하지만, 백매(白梅)와 청매(靑梅)가 많다. 한겨울에 핀 홍매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백매/ 청매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금둔사’ 매화는 우리나라 토종이며 토종 매화는 꽃잎이 더 날렵하고 얇다.

섬진강가에 양계장의 닭처럼 모여 흐드러지게 피는 매화나무는 그 종자의 대부분이 일본산이다. 일본의 매화는 향도 없으나 그 열매만이 실하고, 우리 매화는 향이 좋은 대신 열매가 부실함이 결점이다.

우리 매화는 열매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본디 그 향과 취흥의 품격을 즐기기 위한 꽃이다. 그래서 일본의 것은 대추나무나 감나무처럼 단순한 ‘매실나무에 피는 꽃’을 말하며 우리의 고매화는 그 것과는 격을 달리한다.

매화향은 햇살이 사찰의 경내를 건드리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 시간에 가장 짙으며 꽃도 우아하고 품격도 높다. 그래서 탐매꾼은 아침 일찍 사찰에 도착하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 어젯밤에 마신 술 때문에 어영부영 어정거리다가는 신선이나 맡을 수 있는 그 향내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봄이 금방이라도 올 것만 같은 날이 연속되다가도 불현듯 한겨울처럼 추위가 엄습하는 것이 2월의 날씨이므로 입춘이 지났다 하여 자칫 방심하다가는 건강을 해치기 쉽다. 게다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코로나의 공격으로 잠시의 방심도 금물이다.

직장인으로의 일상이 끝나 퇴직을 하고 벌써 두어달이 지났으며 그 사이 지방의 소도시로 이사를 하여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비로소 시간적 여유가 생겨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알람에 맞추어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를 스케쥴에 따라 지내고 시간표대로 식사를 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따스한 햇살이 눈부신 베란다의 창밖을 내다보며 쇼파에 기대앉아 FM을 들으며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은 그 동안 크고 작은 집의 머슴처럼 집사처럼 지냈던 파란많은 소시민으로의 직장인 그 노고를 달래주는 기분이다.

수도권을 떠나며 돌이켜보면, 나름 치열하게 때론 유유자적으로 살면서 결국 꿈을 이루지도 못했으며 또 짜드락 별반 그럴듯한 목표 또한 없었지만 지나온 나의 삶은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도 있다는 생각이다.

 

홍약국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벚, 찬란한 연분홍 꽃

은파의 달에 걸릴 때

 

추웠던 그 시절

우리가 부르던 노래 떠오르고

오래 전 시위를 떠난

그 화살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 초춘(初春/ 202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