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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木馬)의 노래

Led Zepplin 2021. 8. 11. 03:51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일찍 귀가하신 아버지는 내 손목을 잡으시고 집을 나선 거다. 아버지와 함께 인사동 골목길을 돌아 얼마를 걷자 이웃 동네의 어느 집 앞에 서시더니 그 집 문을 두드리셨다. 잠시 후, 내 또래의 아이가 나와서 누구시냐고 묻자 아버지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시더니 “너희 선생님이 지금 계시느냐?”고 물으시는 거였다. 소녀가 그렇다는 대답을 하자 아버지는 약속한 어른이 찾아왔다고 전하라 하자 곧이어 대학생 또래의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 나와 아버지 앞에 두 손을 모두고 공손히 인사를 하는 거였다. 아버지는 “이미 전달된 이야기대로 아이를 데려왔으니,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나를 건네시고는 정작 나에게는 가타부타 말씀도 없으신 채로 뒤돌아 가셨던 거다.

엉겹결에 영문도 모르는 채 그 아가씨를 따라 일본식 건물의 2층 마루 복도를 따라 어느 방 앞에 도달하자, 아가씨는 나에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했다. 방문이 드르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자, 방안에는 내 또래의 고만고만한 여자아이 다섯 명 정도가 큰 원형 책상을 앞에 두고 오르르르 둘러앉아 책을 펼치고 앉아 있었던 거다. 아가씨는 여자아이 두 명에게 지시하여 간격을 벌리게 하곤 나에게 그 사이에 끼어 앉으라는 거였다. 그리곤, 오늘부터 여기서 그 여자아이들과 저녁마다 공부를 한다는 거였다. 이 상황은 그야말로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던 거다. 아니, 내가 그래.. 여기서.. 내가.. 계집아이들하고 어깨를 맞대고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본다는 거냐.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말도 아니 되는 소리인 거다. 허나, 어쩌리. 오늘은 이미 이렇게 끌려와 앉았으니 어쩌겠나 이 수모를 오늘만 참고 넘기자. 내일부터는 내가 죽어도 안 온다. 쪽팔리게 계집아이들 속에서 말을 섞고 경쟁을 하며 시험까지 치루며 지내야 한다니 참으로 엄청난 망신이로고.....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대로 그렇게 순탄하고 만만하게 흘러가지를 않았다. 나는 첫날과 똑같이 왼쪽에는 약간 통통한 김선아 비스무리한 여자아이/ 오른쪽에는 마른 채시라 비스무리하게 생긴 여자아이를 양 옆에 두고 6개월여를 그 대학생 아가씨 집에서 과외공부를 하며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던 거다. 존심 상하게도 나보다 공부를 잘했던 내 좌우의 두 여자아이는 전국 여중 최고인 이화여중에 모두 합격하였다. 나는 본의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외를 다닌 그 6개월 남짓 동안 그 여자아이들과 미운 정 고운 정이 들고 말았다. 나하고 집 방향이 가장 가까웠던 채시라 비스무리하게 생긴 여자아이. 알고 보니 우리 집에서 직선거리로는 100미터도 안떨어진 다음 골목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 아이는 유명한 종로 수송 국민학교에서 제법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던 거다. 그 아이는 내가 우리 학교 학생회장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골목대장이었던 내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있었던 거다.

6학년을 마친 우리 둘은, 그 겨울방학 동안 내내 날마다 만나 종로의 구석구석과 광화문 그리고 명동 여기저기를 구경 다니며 떡볶기와 오뎅/ 호떡과 국화빵을 사 먹으면서 칼바람으로 유명한 매섭게 추웠던 서울의 겨울을 만끽했다. 중학교를 입학하였어도 우리 둘의 만남은 지속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양쪽 집안의 아버지들도 이미 우리들의 만남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종로2가 화신백화점 옆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었으며 우리 아버지와도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거다. 우리는 때때로 서로의 집으로 찾아가서 함께 공부도 하고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피아노 반주와 함께 노래도 부르며 공부를 했다. 밤 9시 전에는 헤어졌으며, 우리집에서 저녁을 먹고 공부하고 가는 밤에는 내가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곤 했다.

우리가 만난 계절은 여름이었으며 우리가 계절도 잊고 함께 쏘다닌 것은 추운 겨울이었으니 우리는 아직 색칠되지 않은 어린 목마처럼 겨울의 종로/ 광화문/ 명동을 종일토록 쏘다닌 세상 모르는 철부지라 불러야 마땅하리라.
거리는 온통 얼어붙어 쌩쌩이며 차디찬 바람으로 귀를 떼어갈 듯이 아프게 불어댔어도 가슴만은 속 깊이 따뜻한 온기만으로 항상 훈훈했다. 그것은 그녀도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손바닥을 마주치고 깔깔거리고 웃어댔으며, 호주머니에 넣고 나온 땅콩과 사탕을 나누었다. 가진 것 없는 우리가 그 겨울방학을 춥지 않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나의 뜨거운 손길과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합쳐져서 주변의 염려 섞인 시선까지도 모두 녹여 내렸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그해 여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노정객의 말로는 비참했으며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나 역시 밥 먹는 것조차도 어려워졌다. 아버지의 주검에 따른 충격으로 공황상태에 가까워진 나는 불면증과 함께 속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답답함으로 방안에 앉아 있지 못하고 밖으로 싸돌아 다녀야만 하는 이상한 병에 걸렸다. 모범답안 같았던 나는 교실의 맨 뒷줄에 앉는 아이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5살 무렵부터 배워 문교부장관상과 대학총장상을 받았던 미술은 때려치우고 밴드부에 가입하여 트럼펫을 불었다. 아버지의 주검으로 인하여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내 인생의 좌우명은, “예술은 길런지 몰라도, 인생은 짧다.”로 퇴색하여 졌던 거다. 방황과 울분으로 중학 2년과 3년의 시간들이 무참하게 흘러갔다.

중학 3학년이 거의 끝나가는 겨울의 어느 날 밤, 이미 왕래가 거의 끊어진 그녀의 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우리 둘은 처음으로 서로의 몸을 겪었다. 그 밤 이후, 우리 둘은 다시 자주 만나게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경제적 격차를 느낀 내가 거리를 두게 되어 우리 둘의 관계는 서먹거리게 되었다. 우연처럼 문득문득 만났던 우리는, 내가 성적과는 무관하게 목표한 지방으로 떠나는 바람에 그나마 단절되었다. 단절이라고는 하여도, 나는 아주 드물게 골목으로 창이 난 한옥 기와집 그녀의 방 창문 앞에서 그녀가 두드리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창가 벽에 기대어 떠나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 무슨 느낌이었을까, 그녀는 창문을 벌컥 열고 두리번거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 골목의 어둠 속으로 숨어 그녀의 갸름하고 눈부신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내게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한 여자였다. 맑고 하얀 피부와 풍요하고 부드러운 커다란 눈망울/ 갸름한 턱선으로 이어지는 늘씬한 몸매 그리고 유충처럼 하얀 웃음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던 거다. 목 터지도록 피를 토하는 고함으로 불어댔던 트럼펫 소리와 함께 거친 야생마와 같은 나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아물지 못하는 부러진 팔다리의 상처처럼 아픔으로 고통스럽게 지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대학 2학년이 되었다. 성난 들개와도 같았던 내 거친 호흡은 이제 조금 잦아들었으며 눈길도 차츰 가라앉았다. 겨울방학을 맞아 나는 모처럼 멀리 떠나 온 예전 우리 동네 인사동 골목을 오랜만에 둘러보고 안국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어려서 자주 걸었던 안국동을 걸어 명동까지 걷고 싶었다. 안국동 사거리를 지나 비원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대여섯명의 여대생 차림의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곁을 지나고 있었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는데, 왠지 아는 얼굴이 섞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때늦게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아예 뒤로 돌아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실례가 될까 봐 얼른 다시 되돌아 걷던 길을 걸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나에게 “여보세요, 잠시만요!”하며 나를 불러세우며 쫒아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놀랍게도 바로 그녀였다. 우리 둘은 화들짝 놀라며 서로의 손을 움켜쥐고 가까운 커피샵으로 들어갔다.

아직 여명도 벗어지지 않은 신새벽, 우리 둘은 조용히 골목의 여관을 빠져나와 목례를 나누고 밤새 나누었어도 다 못 나눈 많은 이야기를 마음속에 묻은 채 다시 만나겠다는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해주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날 신새벽은 바람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눈이 소리 없이 소복소복 추억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