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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이야기

Led Zepplin 2021. 8. 11. 22:24

(60년 전통의 수원 '대원옥' 냉면)

  나는 여름이면 냉면을 즐겨 먹는다. 남자들은 그중에 대개 물냉면을 좋아한다. 대장암의 수술과 속이 냉하여 위가 약하다는 건강진단의 결과로 의사는 면 종류의 음식과 술을 피하라 하지만, 술과 냉면(국수)을 뺀다면 나머지 나의 인생은 얼마나 밋밋하겠나.

냉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차갑게 식힌 국물에 국수를 말아서 만든 음식이라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무식의 소치일 뿐이며 냉면이란 자고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이 냉면의 독특함이다. 육수를 어떻게 우려냈느냐에 따라서 또한 면의 성분과 함량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리고 그 고명의 구성이 무엇무엇이냐에 따라서 냉면의 맛은 천양지차를 이룬다.

 

조선말 고종황제께서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사리를 말아 편육과 배/ 잣 등을 올려 날마다 먹었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조선말 임유한임하필기에는 순조의 냉면 이야기도 등장한다. 밤늦은 시간 달구경을 하던 순조께서 냉면을 사다 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순조의 재위 기간은 1800~1834년이니 이때 벌써 냉면은 시중에서 널리 팔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시기에 한양 도성 안에 냉면 테이크아웃가게가 있었다는 짐작도 무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달구경을 하다가 냉면을 사다 먹었다니 19세기 초반에 한양에는 심야 냉면 테이크아웃가게가 있었다는 이야기인 거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먹거리에 있어서 세계적인 우리 민족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종로 인사동에 살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냉면으로 유명한 을지로의 우래옥을 다녀왔던 기억을 더듬어 몇 년 전 우래옥의 동치미가 시원하고 담백한 물냉면을 시식했는데 시대의 변화로 이미 달달한 비빔냉면에 길들여진 나의 입맛에는 너무 슴슴하여 그 진맛을 느끼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냉면을 가장 맛있게 먹었던 기억으로는 80년대에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에 있었던 냉면집을 그 첫째로 꼽겠다. 백화점 지하에 있는 간이테이블 서너 개의 흔한 푸드 코트인데, 점심시간이면 오직 그 점포만 유일하게 백화점 코너를 빙빙 돌아가면서 길게 줄을 늘어선다. 그 무렵, 나는 안양 인덕원 옆 관양동에 살면서도 주말이면 차를 달려 그 비냉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오고 갔던 추억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 냉면의 면은, 국산 메밀이 부족하여 비싸므로 대부분 인도산 메밀을 주로 사용한다. 글치만, 아직도 국산 메밀을 주장하는 곳도 더러 있다. 겨울이면, 흙벽에 방바닥도 뜨끈한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의 삼군리 메밀촌의 메밀 막국수는 그 맛이 슴슴하면서도 메밀이 주는 그 맛에 집중한 아름다운 냉면이다.

솥뚜껑에 얇게 부쳐 식전에 내주는 메밀전 한 장은 소박하고 정갈함이 맘에 든다. 양푼 한가득 이 집 냉면을 비우고 나면, 그 냉면이 안겨 준 가슴 훈훈함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단점이라면, 외길로 산골짝 깊숙히 불안불안 조심조심 한참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 거다.

 

맛이란, 타인이 말이나 글로 맛을표현하는 것은 대리만족을 주기도 하지만 진정한 맛은 나의 혀로 직접 맛을 보고 나의 뇌가 맛있다고 느껴야 진짜 맛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혀와 뇌가 맛을 인정하는 집으로 진주에 있는 하연옥, 퓨전 냉면이면서도 전통을 잘 살린 맛있는 냉면집이다. 제주의 흑메밀로 면을 뽑기에 진한 향내가 특징이며 소고기 육수이기에 구수하며 속이 편안하다.

맛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글로 주장해봐야 헛일이지만, 1945년에 창업하였다고 하며 그 맛이 과연 일품이기에 믿어줄 만하다고 본다.

 

수원에서 제일 맛있는 냉면집은 수원 통닭 거리 인근 좁은 골목안에 위치한 60년 전통의 대원옥이다. 어머니께서 하던 주방일을 아들이 이어받아서 하고 있지만, 맛은 변하지 않았다.

장군감으로 손색이 없는 멋진 호남자 대장부의 솜씨이다. 비냉이면서도 다른 집과 다르게 육수가 흥건하게 들어갔으면서도 시원한 식감이 어느 계절에 맛봐도 일품이다.

수원의 토호세력들과 정객/ 관청 수장들의 중식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주의할 점이 언제든지 문이 닫혀있을 수 있으므로 항상 사전 확인이 필요하다.

또한, 서빙과 계산을 맡은 분이 호남자 주방장 사장의 어부인인데.. 소박하면서도 은근한 미인인 지라 씰데읎이 눈을 맞추고 오래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된다. 사장의 어부인이 미인에 눈웃음이 아름다운데다가 사근사근 말장단도 잘 맞추어준다고 하여 눈을 맞춘 채 길게 대화를 끌어가다가는 주방에서 수시로 관찰(?)하는 사장 겸 주방장의 안테나에 걸리면 그 즉시 문을 닫고 그날 장사 종 치는 수가 있을 수 있음을 유의해야만 한다.

 

내가 살던 수원에는 전에 훌륭한 갈비집이 있었다. 그 원조로는 수원갈비의 전설 화춘옥이 있었던 바, 지금은 수원에 갈비 맛집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전국의 갈비집에는 어느 집이거나 후식으로 주문받는 냉면이 있는데, ~ 맛이 없다. 수원뿐 아니라 전국의 갈비집들이 대개 그런 것 같다. 메인 메뉴인 갈비의 맛내기에는 그토록 집중하면서도 후식으로 주문받는 냉면의 맛에는 어찌 그토록 무신경인지 일본사람 음식 장사들에게서 그 한 수를 배워야 한다고 본다. 일본엘 가면, 다찌노미(たちのみ/ 선술집?) 반평 음식장사일지라도 단무지 하나 손님 앞에 내놓는 것에도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이는 것에 감동을 받게 된다. 음식은 역시 재료와 재주보다도 제대로 맛을 내려는 정성과 마음 씀씀이가 더 중요한 거다.

 

올해는 예년보다는 그래도 덜 더웠다. 하지만, 아직도 8월은 길게 남아 있으며 9월도 만만치 않은 시간으로 태양을 머리에 인 채로 발을 구르고 버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역사(歷史)라 이름하는 우리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야말로 메밀의 냉면처럼 가늘고 질긴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씨 뿌려 가꾸며 땀 흘려 농사짓는 우리들의 이름 모를 아름다운 농투산이와 변방의 산골 오지를 오가며 강원도 깊숙한 살둔산장과 같은 좁은 여인숙 방의 목침에 때를 남긴 등짐꾼들, 아무도 그 이름 석 자를 기억해주지 않는 그들과 그 재료들을 취사선택하여 최선의 음식으로 만들어내는 이름없는 수 많은 은둔식달들이야말로 우리 한반도 역사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서슬 퍼런 영웅도 난세를 평정한 대장군도 결국 언젠가는 모두 스러지지만, 우리들의 정신과 그 영혼만은 헤일 수 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대를 이어 유전으로 전해진다.

오늘 우리가 소박한 한 가지 음식 냉면을 두고 애착을 보인 이유 또한 사소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들 한민족이 추구하며 소유하고 있는 민족 고유의 바로 그 가늘고 긴 생명력과 빛나는 정신력 때문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