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안개

Led Zepplin 2022. 10. 22. 04:11

 

 

 

   ‘명진’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오래 전 그날이었다. 그 출발은 한국 불교의 전래에 대하여,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아니지만 타밀 불교의 '남인도'가 ‘허왕후’ 일행을 보내 중국 '산동'을 거쳐 우리나라 남해안 지방의 '가락국'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니 지루한 업무와 숨 가뿐 도시를 뒤로 하고 그 발자취를 따라 봄 한 철 아름다운 산하를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도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길을 떠났던 터이다. 그런 바람으로 ‘순천’행 고속버스에 올라 터미널에서 하차하였다. ‘순천종합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안개가 제법 시야를 가렸다.

‘두타사(頭陀寺)’ 앞에서 버스를 내려 길가에 세워둔 안내판을 바라보니 약간의 경사진 오르막을 걸어 20여 분을 걸어야 할 것만 같은 거리였다. 지방의 안내판은 믿을만한 것도 못되거니와 걷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니 20여 분도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경사진 오르막을 걷기 시작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안개는 안개비로 바뀌어 옷을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하였다. 일주일을 떠돌 요량으로 가득 채워온 오래된 쌤소나이트 캐리어는 겉의 소재가 모직인지라 속까지 젖지는 않을지 살짝 우려스러웠다.

 

‘두타사’의 진입로는 전북 '부안' 변산반도 ‘내소사’의 진입로 못지않은 큰 키의 측백나무와 삼나무가 길 양옆으로 울창하게 도래하고 있어 우중에 깊은 숲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숲길을 걸으면서 남녘이라지만 봄임에도 아직은 추위가 남아있는 날씨에 소리 없이 내리는 안개비에 옷은 축축하게 젖어 왔으며, 비에 젖어 보다 무거워진 캐리어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는 내 모습은 마치 영화 《미션》에서 인간 백정이었던 ‘로드리고’가 과거를 회개하며 본인의 무기까지 집어넣은 본인이 갖고 가기에는 역부족인 엄청난 부피의 짐보따리 망태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과라니족의 촌락까지 산을 거슬러 오르던 무모한 장면이 떠올라 왠지 모를 헛웃음이 나왔다.

아스팔트 포장길을 다 오르자 넓은 주차장이 나타났으며 손으로 쌓아 올린 길게 펼쳐진 정겨운 계단을 올랐더니 좁다란 도랑 위에 걸쳐진 ‘추월교(秋月橋)’라고 적힌 붉은 색의 난간이 아름다운 작은 다리가 나타났다. 아치형의 다리를 건너자, 다른 세상처럼 아담하지만 오래된 ‘대웅전’이 올려 보였으며 그 옆에 ‘종무실’이라고 팻말이 적힌 오래된 한옥이 보였다.

 

‘종무실’이라고 적힌 한옥 건물의 툇마루에 앉아 안개비에 젖은 옷도 말릴 겸 고즈넉한 풍경에 취한 채 다리를 쉬고 있는데, 건너편 또 다른 한옥에서 나온 젊은 스님이 크고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건너 종무실 툇마루에 오르면서 비에 젖은 행색에 커다란 캐리어까지 들고 온 나를 잠시 멈칫거리며 바라보더니 나에게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나는 엉겁결에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렸다며 대답하고 말았다.

‘종무실’ 문을 열고 한 발 들어서던 스님은 나에게 우리 절은 차가 맛있는 절이라면서 차를 마시기에는 좋은 시간이니 들어오셔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하시라면서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다. 의외의 친절한 제안에 마음이 편해진 나는 등산화를 벗고 실내에 들어섰다. 그 ‘종무실’은 오래 묵은 마루로 된 바닥이었으며 생각보다 넓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스님이 권한 자리에 앉자 종무원으로 보이는 젊은 보살이 나에게 엷은 미소를 보이며 마른 수건을 건네주면서 머리와 얼굴을 닦을 것을 권하였다.

 

‘종무실’에 들어서면서 내가 놀란 것은 난로가 피워져 따뜻하고 온화해 보이는 실내의 분위기보다는 종무원으로 보이는 보살의 놀라울 만큼 뛰어난 미모 때문이었다. 사찰의 종무원들이 주로 입고 생활하는 생활 한복 속에 감추어진 그녀는 얼핏 보아도 적당히 훤칠한 큰 키에 풍부한 가슴과 맞춤하여 마르지도 군살로 둔중하지도 않은 곡선 그리고 날씬한 허리춤과 곱게 땋아 늘어뜨린 풍성한 긴 흑발의 머리채와 맑고 뽀얀 얼굴에 약간 서구적으로 보일만큼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이런 산골 외진 절간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외모가 전혀 아니었던 거다.

여자의 외모를 보는 안목이라 칭한 것이 기실 별다른 것은 아니지만, 몇 년 전 친구의 가족 중 한 사람이 경영하는 서울 명동의 미용실을 친구와 함께 드나들면서 마주친 예비 미스코리아 후보녀들과 여자 연예인들을 보며 터득한 눈치코치를 일컬음이다. 종무원 그녀는 한마디로 신비한 외모 그 자체였다. 혹시나 외국인이 아닐까 하는 의아심에서 그녀가 말하는 것을 유심히 들어보았지만 틀림없는 정확한 우리말을 하고 있었다.

 

널따랗고 눈맛이 편안한 원목 다탁에 나와 마주 앉은 스님은 절간에서는 왕왕 만나는 풍경인 차를 준비하고 물을 끓이며 찻잔을 준비하고 헹구는 일련의 과정을 천천히 마련하면서 통상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스님의 법명은 ‘명진’이었으며 지금 이 절 ‘두타사’의 ‘부주지’였다. ‘명진’ 스님은 천천히 쉽고 편하게 말하는 스타일이었으며 목소리는 맑고 살짝 우렁거리는 미성으로 듣기에 좋았다. 큰 키라기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훤칠한 키였으며 날렵하고 군살 없는 몸매에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약간의 길고 뾰족한 인상으로 눈매는 날카로움이 엿보였으며 머리 깎은 두상은 보기에 부담 없는 모습이었다.

‘부주지’라는 직책에 비하여 시골의 사찰이었던 탓인지 마른 손은 마디가 굵고 거친 편이었다. 따뜻한 차가 몇 순배 돌자 나는 하룻밤 머물고 쉬어 갈 수 있겠느냐며 물었는데, 스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하루가 아니라 며칠이라도 쉬었다 가시라며 편하게 대답하였다. 다만, 새벽에는 예불 전에 ‘도량석’을 도는 목탁 소리가 들릴텐데 괘념치 말고 주무시라고 하였으나 나는 ‘새벽예불’에 반드시 참석하고 싶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말하고 말았다.

 

차를 마시고 나서 스님과 함께 종무실 방 밖으로 나오자 언제 적 일이냐는 듯이 안개는 걷혀 있었으며 오후 이른 저녁 무렵이 되어있었다. ‘명진’ 스님은 사찰의 여기저기를 구경시키며 설명을 하였다. 함께 다니던 길목에서 만난 사무장을 인사시켰으며 그는 사무실의 일보다는 바깥일에 주로 종사한다는 것을 말해 주며 내가 머무를 방의 옆방에 거주하고 있으니 필요한 일이 있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공양간’을 안내하면서 주방일을 도맡아보고 있는 공양주를 인사시키자, 공양주 할머니는 식사는 시간에만 맞추어서 얼마든지 편하게 많이 드시라면서 구수한 자태와 목소리에 미소가 떠올랐다.

스님은 우리 절의 식구라 해봐야 ‘명진’스님/ 사무장/ 보살종무원/ 공양주 할머니와 저 위 조그만 ‘암자’에 주지 스님의 형뻘 되는 스님 한 분이 아침저녁 식사 시간에만 내려왔다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머무를 방은 아주 오래 전에 유명한 문인이 머물며 집필하던 방이라는 말을 하여 새삼스러웠다. 아, 그리고 내가 머무를 옆방에는 몸이 쇠약하여 휴양차 내려와 있는 중년의 보살 한 분이 있으니 그런 줄 아시라고 하였다.

 

주지 스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자 스님이 말하기를 주지 스님은 한의사 공부차 ‘중국’에 머물고 있기에 본인이 사찰의 모든 대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뒷산에 녹차밭이 있어서 제법 은근히 여러 가지 일이 많으며 보살종무원이 잡무를 열심히 하고 있어서 큰 불편은 없는데 혹시 전산 업무에 대하여 내가 잘 알면 조금 도와줄 수 있느냐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서울의 규모 있는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간부사원이며 2주간 휴가를 내서 남도 지방을 유람 중임을 밝혔으며, 전산이 전공은 아니지만 잘 안다기보다는 엑셀과 파워포인트 정도는 무난하기에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니 내일부터 틈나는 대로 살펴봐 드리겠노라고 말하였더니 ‘명진’스님은 그래만 주시면 돌아가실 때 좋은 녹차를 챙겨 드리겠다며 좋아하였고 계시는 동안에 편안하게 동생처럼 생각하시라면서 즐거워하였다.

사무장이 마음이 떠서 업무를 등한시한다며 머리가 조금 아프다고 묻지 않은 말을 하였다. 종무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보살종무원에 대하여 질문을 하려 하였으나 나는 말을 삼켰다.

 

산간 지방 사찰답게 산나물로 주로 이루어진 저녁 공양을 배불리 맛있게 먹고 당분간 머물게 될 방에 들어와 보니 방바닥이 제법 따뜻하였다. 이불과 요 그리고 베개가 한 채 벽에 기대어져 있었고 휑뎅그렁한 방의 벽에는 긴 장대를 가로질러 양쪽을 하얀색의 나이롱 끈으로 묶은 간이 옷걸이가 있었으며 윗목에는 소박한 다기가 준비된 원목 다탁이 놓여있었다. 개켜진 이불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방바닥이 따뜻하고 장시간의 여독에 긴장이 풀린 이유인지 나도 모르게 곧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를 잤을까, 여자의 흐느끼는 듯한 울음소리에 설핏 놀라 잠이 깨었다. 한지를 바른 방 밖은 침묵으로 어두웠다. 귀를 기울여 집중하니 소리의 진원은 옆방으로 짐작되었다. 그러자, ‘명진’ 스님이 이야기한 몸이 쇠약하여 휴양차 내려왔다는 옆 방 중년의 보살이 떠올랐다. 숨죽인 울음소리는 들렸다가 멈추기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하며 간헐적으로 구슬프게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 속으로 청소년 시절 잠결에 듣던 어머니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생각났다. 그렇게 우시던 어머니는 다음날에는 반드시 절에 다녀오시곤 하였는데, 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어젯밤과는 다르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박꽃 같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하여 주셨던 거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흐느낌을 들으며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는 구례 ‘화엄사(華嚴寺)’ 옆 샛길로 난 돌담길을 지나 산길을 통하여 굽이굽이 ‘노고단’을 오르고 있었다. 중턱도 아직 오르지 못하였는데, 안개가 앞을 가렸다. 그 안개의 빈틈을 살펴 산길을 오르는 산행은 힘겨웠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르고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 물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귓가에 워낭 소리와 함께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산속에 왠 소 울음소리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물결치는 안개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흰 소가 어렴풋이 눈앞에 보였는데, 그 큰 소는 왕방울 같은 큰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나에게 뚜벅뚜벅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물 마시던 수통을 움켜쥔 채 뒷걸음으로 물러서다가 앉아 쉬던 바위에서 그만 굴러떨어지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그 소리에 놀라 나는 잠이 깨고 말았다.

방이 더웠던 탓인지 꿈에서 놀라 잠에서 깨었던 탓인지 온몸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수건을 내려 얼굴과 가슴을 닦는데, 새벽 도량석을 도는 목탁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잠시 숨을 돌린 나는 옷을 간단하게 갖춰 입고 방을 나서며 법당을 향하였다. 방을 나서면서 나는 옆방의 한지로 바른 그 보살의 방문을 바라보았는데, 그 방은 조용하게 어둠에 잠겨있었다.

 

처음 들어와 서보는 ‘두타사’의 ‘법당’ 안의 공기는 서늘하였고 마루로 된 바닥은 조금 삐걱거렸으며 촛불로만 밝혀진 조명은 약간 어둑한 편이었으나 향내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식솔이 많지는 않으나 그래도 너댓 명은 족히 되건만, ‘법당’에는 ‘명진’ 스님과 나 오직 둘뿐이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로 시작하여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으로 이어지며 두 사람만의 새벽예불이 시작되었다. 예불이 ‘헌향진언’의 중반쯤에 이르자 나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과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면서 예불을 따르고 있었다. 낯선 지방 낯선 ‘법당’ 새로운 시간은 나의 쏟아지는 눈물과 흐느낌 앞에 아무 거리낌을 주지 못하였다.

그 눈물 속에는 가련한 어머니가 보이고 성당에서 주일 미사 시간에 ‘성모송’을 노래하는 고등학생인 내가 보이고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면 내 손을 뜨겁게 감싸 쥐고 놓지 못하던 할머니가 떠오르며 6.25 그 엄혹한 시절 ‘조선노동당’ 경기도 지역의 ‘군당 위원장’을 하였음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괜찮은 직책을 수행하였던 늙은 아버지가 보이고 유년기의 늙은 유모도 보이고 ‘법당’ 안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부처님도 보이고 아이스케키를 빨고 서 있는 소년 시절의 나도 보였다. 짧은 30여 분의 시간 동안 수십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던 거다. ‘주마등(走馬燈)’처럼 말이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종무실’에 들어선 나는 전산 업무를 한 번 검토하자며 스님과 종무원 보살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산의 여러 항목과 분류를 여기저기 둘러보니 규모 있는 기업의 전산 프로그램으로 업무를 다루던 내가 보기에 시골 사찰의 컴퓨터는 문제가 제법 있어 보였다. 잠시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교정 재분류하며 종무원 보살을 가르쳐 주면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절 뒤편의 녹차밭을 구경하고 산을 올라 조그만 ‘암자’를 둘러보았는데 ‘암자’는 단출하였다. ‘암자’란 기실 절의 부속 시설로써, 사찰이 갖는 어쩔 수 없는 이러저러한 번거로움을 피하여 오롯한 수행에 집중하고자 임시로 조성한 조그만 ‘초막’을 말함이지만 겸손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토굴’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으나 웬만한 전원주택 시설 못지않은 번듯함을 위장하기 위한 단어로 ‘토굴’이라 칭하는 자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숨을 헐떡이며 산의 정상에 올라 다리를 괴고 앉아 남해와 산하를 오랫동안 멍하니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아주 오래전 ‘중국’의 ‘동산(910~980)’ 선사가 ‘양주’의 ‘동산’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동산’ 선사에게 질문하였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동산’ 선사는 그 질문에 대답하였다. “마삼근(麻三斤)이다.” ‘양주’ 지방의 남자들이 바쳐야 했던 삼 세 근의 세금, 그 부역의 의무는 피할 수 없는 각자 본인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나만의 마삼근, 오직 내가 부담해야만 할 나만의 마삼근 말이다.

 

중국 ‘당’의 시대 강서성 백장현의 백장산 ‘백장사’에 주석하신 ‘백장(百丈)’ 선사께서 어느 날 설법이 끝난 후 대중이 모두 해산하였으나 한 노인이 남아 돌아가지 않았다. 선사께서 이유를 묻자, 노인은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가섭불(迦葉佛)’ 시대에 이 절 주지였는데 어떤 스님이 나에게 ‘깨달아도 인과에 빠집니까? 안 빠집니까?’ 하고 묻기에 내가 ‘빠지지 않는다.’며 잘못 대답한 업보로 여우 몸을 받았습니다. 스님께서 그 탈을 벗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선사께서는 노인에게 “그렇다면, 나에게 다시 질문하시요.”하여 노인이 다시 질문하니, 백장이 “인과에 매(昧)이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자 노인은 대단히 기뻐하며, “내 이제 여우의 몸을 벗었습니다.”하고는 선사에게 절을 올리며 “지금 뒷산에는 여우 한 마리가 죽어 있을 터이니 장사를 좀 지내주십시오.” 하며 부탁을 하였다.

‘백장’ 선사께서는 다음날 대중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 동굴에서 여우의 사체를 찾아 ‘다비식’을 지내주었다. 안개 속 같은 인과의 바다에서 언제 어떻게 깨달음의 구름 위를 걷게 되겠는지 삶은 그 길을 보여주지 않는데 오늘 하루도 그저 속절없이 다시 저물어가고 있다.

 

저녁 공양 시간을 놓칠 수도 있기에 깜짝 놀라 서둘러 산을 내려와 ‘공양간’에 들어섰다. 이 시골 절은 처사와 보살이 따로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같은 반찬이 따로 차려져 있다. 물론, 스님들의 음식은 따로 차려져 있다. 스님이라 해봐야 ‘명진’ 스님과 암자의 나이 많은 스님뿐이지만 말이다. 맞은편에 앉은 사무장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였다. 마주 앉아 뻘쭘하니 묵묵히 밥을 먹기가 민망하여 사무장에게 산 위에 올랐다 온 이야기를 하였더니 웃는 표정으로 화답을 하며 몇 가지 설명을 더 해 주었다. 보기보다는 열린 사람 같았다.

공양주는 나이는 들었으되 미인에 속한 얼굴이었다. 처사들보다 나중에 식사 자리에 들어선 ‘종무실’의 보살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하였으며, 옆방에 들어있다는 중년의 보살도 따라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하는 중에 슬며시 살펴보았지만, 종무원 보살은 다시 보아도 역시 뛰어난 미인이었다. 중년의 보살은 환자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일반인보다 맑고 하얀 귀여움이 있는 얼굴에 무병(巫病)이 있는 듯 눈매에 날카로움도 있는 묘한 인상의 여자였다.

사무장에게 종무원 보살의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어차피 곧 알게 된다더니 웃으면서 즉시 답이 돌아왔다. 종무원 보살의 이름은 ‘혜진(慧眞)’이며, 옆방의 보살은 ‘’목련‘ 보살이라 하였다. 그날 밤, 심야에 갑자기 아랫배가 싸르르 아파오는 바람에 방으로부터 50여 미터나 떨어진 ’해우소(解憂所)‘를 종종걸음으로 다녀오는데, 어디선가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뒷골이 곤두서는 느낌이었지만, 분명 사람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어 좌우를 둘러보았는데 내 옆방의 ’목련‘ 보살의 방이 아닌 종무실에 딸린 ’혜진‘ 보살의 방이 틀림없었다. 그 방 옆의 툇마루에 조용히 앉아 먼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혜진‘ 보살의 울음은 간헐적으로 흐느끼며 들려왔다. 10여 분을 앉아 있던 나는 소리 없이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저녁 공양을 마치고 눈맛이 시원하도록 주차장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곳의 널따란 바위 위에 사무장과 둘이 앉아 저녁이 내려오는 시간의 고즈넉한 산골 풍경을 음미하였으며 배가 부른 탓인지 풍경은 더욱 평화롭게 다가왔다. ’공양간‘의 공양주 주무실 방에 장작불을 때는지 희미한 연기와 나무 향이 기분 좋게 전해왔다.

얼마 후, 내 방에 들어와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사무장이 방문을 두드렸다. 내가 방바닥을 무릎으로 기어 방문을 열자, 사무장은 나를 보면서 “서울 처사님은 밤에 무슨 할 일이 있으십니까?” “왠걸요, 놀러 온 자가 뭔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시다면, 저희와 샤워나 하고 시내 구경이나 다녀오시죠.”하며 뭔 말인지 어리둥절한 나에게 “가보시면 아십니다.”하며 사무장이 웃으면서 일어나 나올 것을 권하였다.

사무장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주차장‘에 봉고차가 서 있다. 차 안에는 ’명진‘ 스님과 종무원 보살 ’혜진‘이 이미 앉아 있었으며, 나는 운전을 할 사무장 옆 조수석의 자리에 앉았다. 우리를 태운 사무장은 산길을 달려 ’순천‘ 시내의 어느 깔끔한 ’사우나‘ 건물이 있는 ’주차장‘에 차를 도착시켰다. 내리라는 눈짓을 보낸 사무장을 따라 하차하였더니 스님과 ’혜진‘ 보살도 함께 하차하였다. ’사우나‘ 건물로 들어선 우리 일행은, 남자들은 남탕으로 ’혜진’ 보살은 여탕으로 각각 헤어져 들어갔다. 우리 사내 셋은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차를 운전하여 어딘가 모를 근처 번화한 동네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리 일행은 모두 하차하였다. 네온사인 불이 돌아가는 지하 노래방의 계단을 내려간 우리는 익숙한 듯한 주인의 안내에 따라 조금 큰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어서 맥주 다섯 병이 제공되었으며 차가운 글라스에 따라진 시원한 네 잔의 맥주는 목욕탕에서 나온 뒤 끝인지라 가볍게 마셔졌다.

사무장이 일어나서 ‘그 겨울의 찻집’으로 테이프를 끊었으며 ‘명진’ 스님은 ‘송학사’를 잔잔하면서도 의미있게 노래하였고 얼떨결에 일어선 나는 ‘Q’를 불렀다. 미소를 지으며 일어선 ‘혜진’ 보살은 ‘안개’를 간들어지게 노래하여 우리 사내들 셋은 넋을 빼고 귀를 쫑긋거리며 들었던 거다. 대충 그러한 순서로 노래를 연속적으로 불렀다. 2시간은 순식간처럼 흘러갔으며 맥주 다섯 병은 골고루 적당하게 배분하여 마셨다. 노래방의 주인이 30여 분을 추가 서비스로 제공하였으며 그 또한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주차장으로 올라오니 취기와 노래를 부르던 열기 때문인지 밖의 공기가 제법 시원하게 느껴졌다. 별로 취한 것 같지 않은 사무장이 운전하여 ‘두타사’로 올라왔다. 지방인 탓인지 음주운전에 대한 걱정은 다들 없었다. 경내로 들어선 우리들은 서로 웃음과 함께 각자 자기들만의 방을 향하여 헤어졌다. 누가 방의 불을 땠는지 방바닥은 따뜻하였으며 자리를 펴고 누우니 노래방 천정에 매달린 반짝거리던 오색 사인 등이 빙글거리며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혜진’ 보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튿날도 그리고 다음 날도 항상 언제나 빠짐없이 게으름 부리지 않고 나는 새벽예불에 참석하였으며, 때때로 사무장과 ‘혜진’ 보살 ‘목련’ 보살이 공양주께서 참석하였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면 잠을 한 숨 더 청하였고 아침 공양이 끝나면 사찰의 이곳저곳을 빗질하는 사무장을 따라서 함께 천천히 대빗자루로 빗질을 하며 오전의 조용한 경내의 분위기를 즐겼다. 오후에는 격일로 산을 올랐으며 때로는 아랫마을로 내려가 동네 구경을 하였다.

하루는 산에 오르다가 ‘목련’ 보살을 만났다. ‘목련’ 보살은 마치 나를 기다린 듯이 산길의 나무에 의지하여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공양간’에서 항상 마주치다 보니 서로 어색한 낯빛은 없었다. 내가 산에 자주 오르시냐며 인사를 건네자 보살은 아주 때때로 올라온다며 씩씩하게 내가 산을 잘 탄다면서 운동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 둘은 산을 올랐으며 지나치게 경사진 곳에서는 내가 손을 내밀자 보살은 낯선 사내의 손을 잡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기꺼이 내 손을 잡고 위험한 곳은 나에게 의지하였다. 산 정상에 올라 어느 바위에 약간의 곁을 두고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살은 ‘혜진’ 종무원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본인은 무병(巫病)이 있어서 요양차 머무르고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였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이 적었다. 말하는 스타일이나 옷차림새가 대졸 이상의 학력이 있는 중산층은 족히 되어 보였으며 결혼은 하였으며 아이는 없다고 묻지 않은 말도 들려주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에게 궁금증이 있으리라고 예상하며 말하는 듯 보였다.

 

아침 공양을 마친 어느 날, 방문을 두드린 사무장이 함께 시장엘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구경삼아 따라가겠다며 주차장엘 내려가니 차 안에는 ‘명진’ 스님과 ‘혜진’ 보살이 먼저 와있었으며 어서 오라고 웃으며 반겨 주었다. 며칠 후에 있을 ‘천도재’를 위한 장을 본다는 것이었으며 떡과 과일은 전화 한 통으로 모두 배달되므로 소소한 장만 보면 된다는 거였다.

모두 함께 시장 구경 겸 장보기가 대충 끝나자, 스님의 요청으로 짜장면을 먹으러 평소 다니는듯한 중화요리 집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안내된 우리는 짜장면 4인분을 주문하였으며 주문받으러 들어 온 아주머니에게 한 그릇에는 고기를 넣지 말라고 홀의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였는데 아주머니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가끔 그 중화요리 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는데 어느 날인가 사무장은 우리 둘이 있을 때 나에게 스님의 그릇에도 우리와 똑같이 돼지고기가 들어가며 단골인 스님이 고기를 넣지 말라는 말도 그 음식점 주인은 말귀를 해석하여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 거라고 말해 주었으며 나도 그러리라고 예상하였다고 응대하였던 거다. 우야든동, 그 집 짜장면은 제법 맛이 있었다. 훗날, 맛없는 짜장면을 만나는 경우에는 때때로 그 집이 떠올랐다.

내가 머무르는 동안, ‘부처님 오신 날’을 만나게 되어 나는 며칠간을 정신이 쑥 빠지도록 분주하게 지내게 되었다. ‘명진’ 스님이 원했던 전산 업무는 내가 있는 동안 ‘혜진’ 보살에게 필수 불가결한 사항들이 집중적으로 교정 전수되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난 후에, ‘명진’ 스님은 지금 중국에 있는 주지 스님께서 보관 중인 창고에서 가져왔다며 챙겨준 중국의 명차인 ‘보이차’를 챙겨 들고 나는 ‘두타사’에서 하산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업무에 복귀한 나는 ‘두타사’를 까맣게 잊고 밀려있는 업무에 빠져 도돌이표 도시 직장인으로써의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 바쁜 시간 속에서 나는 여러 번 일본을 오고 갔으며 진급과 업무의 폭증 등으로 정신없는 몇 해를 보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러한 어느 해 3월이던가, 종단 본사에 평소 알고 지내던 노스님께서 잘 지내느냐 하시면서 바쁘지 않으면 차나 한 잔 하러 들리라는 말씀이 계셔서 며칠 후에 스님을 찾아 뵈었다. 스님은 성북동에 스님과 함께 동문수학한 벗과 같은 스님의 사찰이 있는데, 그 사찰이 ‘납골당’을 크게 신설하면서 사찰의 규모를 키우려고 하니 그 사찰 전체의 프로그램을 일괄 기획하고 진행해 줄 수 있겠느냐며 나의 의사를 타진하셨다.

나는 황송한 하명이오며 제가 직장인인지라 시간도 없을 뿐 아니라 능력도 부족하다며 극구 사양 하였으나 평소 나를 과대평가하셨던지 처사야말로 적임자임을 처사와 함께 시간을 보낸 신도와 스님들의 한결같은 공감이라면서 더는 주저하고 사양하지 말아야 하며 부처님께서 하명한 소임을 뿌리치는 죄를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우격다짐에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며 물러 나왔지만 참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던 거다.

그러나, 며칠 후의 어느 주말에 나는 노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찰의 주지 스님을 방문하고 말았다. 주지 스님과 차를 나누며 인사를 마치고 종무실의 종무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당 한 켠에 딸린 조그만 불교용품 매점에 들어서며 주지 스님의 안내로 매점 보살과도 인사를 나누고 매점 보살의 맞은편에 나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어느 스님과 돌아서면서 인사를 나누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 스님은 ‘명진’ 스님이었던 거다.

 

의외로 차분한 표정의 ‘명진’ 스님은 남몰래 잠깐 입의 복판에 둘째 손가락을 세워 입을 다물라는 의사를 표시하며 나에게 합장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사찰의 종무실장을 포함한 여러 대중들과 골고루 인사를 나눈 나는 다음 주부터 시간을 내어 사찰의 업그레이드 행사에 본격 참여할 것임을 주지 스님에게 약속하고 사찰을 물러 나왔다.

이후, 그 절에 들러 여러 가지 사무적인 일을 진행하면서 ‘명진’ 스님과 마주쳐도 합장으로 인사만 나눌 뿐 이 사찰에 무슨 일로 와있느냐 묻지 않았다. 이유는, 왠지 말하지 못할 어떤 사연이 있는 게 아니냐는 짐작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런 며칠 뒤의 어느 날, 공양간에서 점심 공양 중에 우연히 ‘명진’ 스님이 법당에서 독경 염불을 하며 목탁을 치는 단순 소임으로 월급을 받는 임시직으로 취직하여 일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잠시 망연자실에 빠졌다.

예상대로 ‘명진’ 스님에게는 나에게 설명 못 할 어떤 사연이 생겼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차마 ‘명진’ 스님에게 구체적인 질문을 하지 못한 채 내게 주어진 책무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으며 사찰의 일을 기획하고 점검하면서 오고 갔을 뿐 나는 ‘명진’ 스님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어느 날, ‘납골당’ 건축의 일하는 인부들이 오전 새참 먹는 시간에 곁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내 귀에 어떤 인부가 “있자녀. 여기 목탁 치는 ‘명진’이라는 중이 경찰들에게 쫒기다가 여기에 숨어있다는 것이 들통나서 도주했다더구만.” “아니, 그 스님의 염불 목탁이 우리나라 최고라던데. 그 중이 목탁 치며 염불을 하면 멀쩡한 인간도 줄줄 눈물이 흐를 지경으로 청승절정 전국에 소문이 따르르하다는 거 아녀? 그런 유명한 중이 왜 뭔 죄를 지었다는 거여?” “그러게 말이여, 나도 들은 말인데 남쪽 지방의 어느 절에서 기막힌 일이 있었다등마.”

“아니, 긍게 그거이 뭔 일이냐니께. 속시원허니 싸게 말해 보드라구.” “그니까, 그 ‘명진’이라는 중이 좋아하던 같이 근무하는 여 종무원을 찔러 죽이고 도망을 쳤다나봐.” ‘에헤이, 클나겄구만. 그게 아니구.. 본래 ’명진‘이 있던 절에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자세한 내력이 적힌 귀한 책이 있으며 또 반가사유상 못지않은 보물에 버금가는 조그만 금불상이 있는데 그걸 훔치려고 강도가 밤에 몰래 들이닥쳤다가 ’명진‘이 가로막자 여 종무원이 앞에 뛰어들어 강도가 엉겹결에 휘두른 칼에 보살이 찔려 죽었는데, 그 순간을 목격한 절에 머무르는 어떤 여자가 도망친 강도는 보지도 못한 채 ’명진‘이 여자를 찔러 죽였다고 오해하여 경찰에게 신고를 하는 바람에 부지불식간에 스님이 야반도주를 하였다는구만.“

 

”아니 글타문, ‘명진’ 스님이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강도들이 그랬노라고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면 될 것인디 우째 도망을 쳤다는 것이여.” “맞는 말이지. 그런데, 그 죽은 여 종무원이 대단한 미인이고 사실은 그 둘이 어려서부터 이웃에 살던 잘 아는 오빠 동생 하던 사이라네. 그 보살이 어려서부터 워낙 그 ‘명진’을 사모하여 중이 된 절까정 쫒아다니문서 스님의 시중을 들며 종무원 일을 했다는 거여. 그런데 또 거기 안타까운 사연이 있더구만. 죽은 보살의 손가락에는 은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는데, 반지의 그 안쪽에는 ‘원유 LUV 미숙’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구만. ‘원유’는 ’명진‘ 스님의 세속 이름이고 ’미숙‘은 그 종무 보살의 세속 이름이라는 거지.”

“아니, 그걸 누가 아남? 그거는 누가 지어낸 이야기 아녀?” “저런 인간이 꼭 있다니께. 그게 아니고, 그 절의 공양간에서 일하던 공양주 할매가 사실은 그 보살종무원의 에미였다지 뭐여. 아무래도 그 엄마가 이런저런 내막을 잘 알지않겄남.” “그럼 새칠로 말혀서.. 장모가 사위와 딸의 밥을 해먹이고 있었단 말이나 마찬가지구마이.“ ’글치, 그러나 그 둘이 피차 미혼이니께 장모까지는 아니라고 봐야겠지.” “내가 볼 적에는, ‘명진’ 스님이 스스로 자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한 여자가 죽었다는 충격으로 스님이 자수를 못 하지만 조만간 자수할 것이라고 보네.”

내가 그날 할 일을 마치고 북악스카이웨이 길을 굽이굽이 돌아 운전하며 우리 아파트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의 라디오에서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는 노래가 진공 속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안개’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허공에 뜬 작은 물방울이 응결한 현상이며 액체이다. 안개로 인하여 시야 확보가 잘 안 되므로 사물과 실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같은 물방울이지만, 눈앞에 잘 안 보이면 ‘안개’라 말하며 높은 곳에 머물러 잘 보이면 ‘구름’이라 이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