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부터 ‘연꽃’은 남다른 꽃이었다. ‘연꽃’은 많은 꽃 중의 하나로 보기에는 단순하지 않은 꽃이었으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정겹고 아름답게 보인다. 한 시절 욕망의 시선으로는 ‘연꽃’만의 고즈넉한 연분홍 품격은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오랫동안 부질없이 헤매다 먼 길을 돌아와 이제 삶을 되돌아볼 나이가 되니 여름의 열기 속에서 누구에게도 내세우지 않는 그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연꽃’의 품격과 미모를 다시금 보게 된다.
‘연꽃’의 미모와 품격을 처음 느껴본 곳은 아무래도 〈부여〉의 〈궁남지(宮南池)〉일 것이다. 오래전 〈궁남지〉는 관광명소가 아닌 그저 평범한 시골의 큰 연못이었다. 다만, 못 한가운데에 왠 정자가 문득 있었을 뿐이었다. 못 한 가운데 〈포룡정〉이라는 정자와 정자까지 연결되는 아름다운 무지개다리가 없었더라면, 버드나무가 못가에 길게 늘어진 그저 단순 평범한 연못이었을 게다. 〈궁남지〉는 〈백제〉의 별궁 연못이었으며, 〈백제〉 ‘무왕’ 사비시대에 조성했을 것으로 알려지며 ‘무왕’은 〈신라〉에서 온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은 ‘서동’이라는 로맨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곧 ‘무왕’이다.
〈궁남지〉가 고향인 〈신라〉를 그리워하는 ‘선화공주’를 위하여 ‘무왕’께서 만든 연못이라는 말처럼 누군가의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지어진 대로, 나는 마음이 답답할 때이거나 울적할 때면 훌쩍 수도권을 벗어나 〈천안시〉를 외곽으로 돌아 〈차령〉 고개를 넘어 시골길의 정취를 느끼며 〈공주〉의 〈우금치〉를 지나 꼬불꼬불 차를 달려 〈부여〉의 〈궁남지〉에 도착하여 물가의 의자에 앉아 넋을 놓고 망연하게 버드나무와 ‘연꽃’을 스치는 바람을 쏘이다 보면 도시와 직장생활에서 생긴 스트레스와 고통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녹아드는 기분이다. 시간이 흘러가도 좋고 마침 그 무렵에 서산에 노을을 물들이며 해가 넘어가도 마냥 좋다. ‘연꽃’을 스치는 바람결에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꽃 향이 마냥 싱그럽고 정신을 편안하게 하여준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하고 고귀한 식물이며 꽃말도 ‘순결’이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등 불교와 인연이 깊다. ‘심청전’에는 ‘심청이’가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바다에 몸을 던졌으나 ‘용왕’께서 이를 갸륵히 여겨 ‘심청이’를 ‘연꽃’에 실려 황제를 만나 황후가 되게 하였다는 ‘심청전’도 ‘연꽃’을 모티브로 한다.
‘연꽃’을 바라보자면 삶의 품격을 깨닫는다. ‘연꽃’은 진흙밭에서 자라지만 결코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그 연잎의 위에는 단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으며 오직 맑고 깨끗하다.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연꽃’이 피어오르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꽃 향이 연못에 가득하다.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진다. 활짝 핀 ‘연꽃’을 보고 있자면 우리 삶도 덧없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라 ‘연꽃’은 말 없는 미소를 보여 준다.
〈궁남지〉말고 또 떠오르는 ‘연꽃’이 있다. 마흔의 후반에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껴 전국을 떠돌 무렵에 경북의 궁벽한 산촌 〈왕피천〉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머물렀던 경북 〈울진〉의 금강송면 하원리에 있던 우리집에서 백구를 앞세우고 마당을 나서 천하 일급수 맑은 여울물의 돌다리를 건너고 눈을 들어 절경을 감상하며 느릿느릿 걸어도 15분이면 도착하였던 주변 경관과 절과 비구니스님들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불영사〉의 아담한 연못에 핀 우아하고 청초한 ‘연꽃’도 잊을 수 없다.
〈울진〉 읍내의 〈연호정〉이 있는 〈연호〉에 핀 ‘연꽃’도 참으로 아름답다. 읍내에서 문득 만나는 그렇게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여름이면 호수 가득 피어있는 ‘연꽃’의 군무에는 환호성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여느 연못처럼 못 안에 꽃이 너무 많이 가득 채워 부담스러운 풍경에 비한다면, 〈연호〉의 ‘연꽃’은 가득 피어도 그 풍경이 넘치게 부담스럽기보다는 가득 찬 그 풍경이 오히려 자연스러우며 만족스럽게 여유롭고 풍요로워 보인다.
요즘 고속도로 노선 때문에 나라가 온통 시끄러운 〈양평〉 〈두물머리〉의 ‘세미원’은 그 풍광이 빼어나기도 하거니와 한강 물의 오염을 막기 위하여 식재한 정화 능력이 뛰어난 ‘연꽃’ 덕분에 여름이면 정원에 연꽃이 가득하다. ‘연꽃’은 오래전부터 먹거리로 쓰이기도 했다. 연근과 연잎밥이 대표적이며, 차로도 마시는데 〈무안〉 〈백련지〉와 〈부여〉 〈궁남지〉의 ‘백련차’가 빼어나다. ‘백련차’의 그 따스하고 은은한 향취는 일품이다. “남자가 갑자기 꽃이 좋아지면 갱년기”라는 말도 있는데, 나는 젊어서부터 꽃을 좋아했으므로 그 말도 사람 나름의 우스개로 들린다.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연꽃’ 구경이 있다. ‘단군왕검’께서 ‘참성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올린 〈마니산〉이 있는 〈강화도〉의 번잡한 읍내를 빠져나와 〈선원면〉으로 넘어오는 ‘대문고개’를 넘어오자면 고개를 넘어오면서 만나게 되는 꽃말도 아름다운 ‘환희’라 일컫는 ‘자귀나무’가 수려하게 피어있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넘어 삼거리에서 좌로 꺾어 〈선원사〉에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연못에 핀 ‘연꽃’도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지금은 어딜 가나 대체로 주변 시설이 상업화하여 예전의 그 풍광이 고즈넉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사라져 아쉬움이 많기는 하지만, ‘연꽃’이라는 단어만 입에 올려도 그 은은하고 고즈넉한 아름다움으로 미소가 떠오르고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짐을 느끼게 해준다.
지나온 맨발의 진흙밭
뉘라서 알리오만
돌아갈 수 없는 그 길
되짚어 돌아갈래
꼭 다문 입술 사이로
그래도 흘러나오는 슬픔
수렁에 빠져 있어도
수려한 붉은 빛 미소
저자의 시궁창에서도
맑은 미소 보일 수 있도록
얼바람 신화 접어두고
때깔 착한 자화상 그려본다.
- - - - - 연꽃을 스치는 바람처럼/ 2023.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