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봉우리》에서 만난 숲속 길

Led Zepplin 2023. 9. 11. 23:46

 

(대둔산)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에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 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 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   김민기/ 《봉우리》 가사 부분
 
《봉우리》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김민기’가 작사/ 작곡하여 1993년 본인의 대표곡을 재녹음한 컴필레이션을 발표할 때 수록한 곡이다.
이 곡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딴 이유로 선수촌에 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 이들을 위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을 때 그 주제곡으로 만든 곡이라는 것이며, 시작은 독백으로 출발하며 담담하게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봉우리》는 그가 멜로디의 서정성과 가사의 아름다움에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김민기’가 대한민국의 영향력 있는 싱어송라이터이자 뮤지컬 연출가이며, 대한민국에서 포크송과 뮤지컬의 역사와 흐름을 논할 때 중요한 인물로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인임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우리가 ‘김민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라디오에서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10대 그 무참하던 시절, 잠 못 이루는 늦은 밤 이불속에 엎드려 베개에 턱을 괸 채 들은 소리죽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김민기’의 ‘아침이슬’/ ‘친구’를 들으며 밤을 지새우던 시절이 있었다.
‘김민기’의 여러 노래는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많은 부분에 공감과 슬픔을 함께 나누게 되었던 거다. 그의 파란 많은 젊은 시절은 그가 대단한 음악인이자 연출가로 성장하는 큰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다시 2016년 그 늦은 가을, 퇴근과 동시에 저녁도 굶고 버스를 타고 광화문 광장으로 달려가 촛불을 들고 ‘아침이슬’/ ‘내 나라 내 겨레’/ ‘상록수’/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김민기’의 노래를 소리쳐 부르며 수만의 군중과 함께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구호를 목청 터지게 외치며 노래를 부른 그 시절 열정이 새삼 새롭다.
 
중저음 사색적인 목소리의 인상적인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노래 《봉우리》는, 1970년대라는 민주주의와 암울한 문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2023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그토록 목메어 외쳤던 자유민주주의가 봉우리의 어디쯤 와있는 것인지 답답해진다.
또한, 교정에 놓인 수도꼭지의 물을 마시고 점심을 굶어가면서 허기를 참고 학업을 이어갔던 가난의 힘든 고난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가 얻은 이 물질적 풍요가 과연 만족스러운 젊음의 보상인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겠다.
지금 여기가 봉우리가 맞는 것인지 아니 아직 봉우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며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여기 이곳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오르고 싶어 하던 바로 그 봉우리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오른 지금 이 봉우리에서 우리는 더 올라가야 하는가 내려가야 하는가.
 
산다는 것이 결국 어디를 향하여 가는 것인지 문득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내 삶의 지향이 어디인지 스스로 물어볼 때가 있다. 그동안 홀로 고독하게 살아왔으며 일하였고 노력하였으되 이루지 못한 많은 것들에 문득 공허해질 때가 있다. 이런 질문들이 소용돌이칠 때 우리는 무척이나 외로워진다.
《봉우리》는 희망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우리네 인생에서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이어지는 것이 삶이니 오르려고만 하지 말고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도 있으니 지나치게 애쓰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 다정한 친구의 토닥거림처럼 말해 준다.
 
그 낮은 데로만 흘러서 고인 바다 위에서 작은 배들도 유유히 연기를 뿜으며 가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를 이루려고 서두르지 마시게.
마침내 고갯마루에 올라서도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대지 마시게. 우리가 자네를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이루었다고 자랑할 것도 내 고생을 알아봐 달라고 하소연할 필요도 없는 걸세.
우리가 그동안 흘린 그 많은 땀은 지나가는 바람 세월 친구 사랑 따위가 식혀줄걸쎄. 더러 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때는 어머니의 품처럼 저 넓은 바다를 생각하세. 어쩌면, 그 바다가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바로 지금 여기 숲속에 난 좁다란 길 여긴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