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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묘비명

Led Zepplin 2006. 7. 2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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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떤 시골에 할머니 한분이 살았답니다.. 어느 날, 이 할매가 장의사를 찾아가 내가 죽으면 묘비에 "처녀로 태어나 처녀로 살다 처녀로 죽다"라고 적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할매는 돌아 가셨는데... 장의사가 석수장이에게 비문을 불러주며 "처녀로 태어나 처녀로 살다 처녀로 죽다"라고 새겨달라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석수가 무척 게으른 사람으로 퇴근할 때가 다 되었는데... "처녀로 태어나 처녀로 살다 처녀로 죽다"라고 새기려니까 비문이 너무 길어 퇴근이 늦어질 것 같아지자 잔머리를 굴려 다섯 글자로 줄였답니다. "미개봉 반납."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탄생으로 표현되는 이 화창한 어느 봄날 어떤 사람이 묘지에 갔다가 아래와 같은 묘비명을 보았습니다. '변호사, 정직한 사람, 박달봉 이곳에 묻히다.' 그러자 사나이는 탄성을 질렀다네요. “야아!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한 무덤속에 세 사람이 묻혀 있다니...”
 
사랑의 고뇌와 영혼의 절망을 노래하여 특출한 시 세계를 입증하고, 연상의 여성작가 죠르쥬 상드를 열렬히 사랑했던 프랑스의 대표적인 4대 서정시인중 한 사람인 알프레드 뒤 뮈세는 “나 죽거든 사랑하는 친구여 내 무덤위에 버드나무를 심어다오. 그늘 드리운 그 가지를 좋아하노니 창백한 그 빛 정답게 그리워라 내 잠든 땅 위에 그 그늘 사뿐히 드리워다오.”라고 서정적인 묘비명을 남겼더군요.

 

근대 정수론의 아버지로써 자신의 일생을 일차 방정식으로 표현할 만큼 수학을 사랑했던 수학자 디오판토스는 “여행자여! 이 돌 아래 디오판토스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그의 신비스런 생애를 수로 말해 보겠다. 그는 일생의 1/6은 소년이었고, 1/12이 지나 수염이 났으며, 1/7이 지나서 결혼하였다. 결혼한 5년 뒤에 아들이 태어났으나, 아들은 아버지의 반밖에 살지 못했다. 아들이 죽은 후 4년 뒤 세상을 떠나다.”라고 묘비명을 남겼답니다. 계산하기 좋아 하는 분들이 계산할까 무서워 미리 말합니다. 14..21..33..38..42..80..84살에 죽었습니다.

 

미국의 철강 왕이자 유명한 카네기 자서전의 주인공 앤드류 카네기는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 여기에 잠들다."라고 적었으며, 미리 써 놓은 빌게이츠의 묘비명은 로그아웃..이라네요...넝담^^~

 

음악 시간에 안불러본 사람이 없을 정도의 ‘로렐라이’ 라는 곡의 시를 썼던 하이네는 유태계 독일인으로써 수많은 철학과 이념의 갈등 속에서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운 정신과 착취 없는 평등한 사회를 갈구하고 투쟁했으며, 그 깊은 고뇌의 파란만장한 흔적들을 주옥같은 작품으로 남겼으며 파리로 망명하여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하이네는 “방랑에 지친 나그네의 마지막 안식처는 어디에 / 남쪽의 야자수 아래에 있을지 / 라인강가의 보리수 그늘 아래에 있을지 / 어떤 사막에서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매장될는지 / 어떤 해변의 모래 속에서 안식처를 찾을지 / 그 곳이든 이 곳이든 어디에 있든지 하늘에 둘러싸여 있겠지 / 별들은 나의 무덤을 비추는 등불이 되겠지.”라는 역시 세계적인 시인다운 주옥같은 묘비명을 남겼습니다.

 

영국의 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썼고, 모리야 센얀이라는 일본의 선승(禪僧)은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 줘. 운이 좋으면 밑둥이 샐지도 몰라”라며 유머스럽게 마지막을 장식하였고, “살고, 쓰고, 사랑했다”는 작가 스탕달의 묘비명.

 

소설가 공지영씨는 최근 묘비명을 미리 써놓았는데, “나 열렬하게 사랑했고 열렬하게 상처 받았고 열렬하게 좌절했고 열렬하게 슬퍼했으나, 모든 것을 열렬한 삶으로 받아들였다”라는군요.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 ‘귀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했죠. 살아 온 인생을 소풍이었노라고 마치 미리 쓰는 묘비명처럼 말입니다.

 

현대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주인공으로 독일 군돌프 문화상을 수상하고 작년 서울 국제 문화 포럼에 참석했던 시인 김광규의 시 ‘묘비명’은 자못 비장합니다. “한 줄의 시는커녕 /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 많은 돈을 벌었고 / 높은 자리에 올라 /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 이 묘비는 살아남아 /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그리스 인 조르바’ ‘영혼의 자서전’을 집필했던 위대한 작가, 두 번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영국의 문예 비평가 콜린 윌슨은 아래와 같은 글로 그를 평가했습니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 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였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똘스또이, 도스또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극히 독창적인 해석으로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파문까지 당하게 되었으며,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 크레타 섬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생전에 그가 마련해 놓은 묘비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 나는 자유이므로...”